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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흥은행 이혼녀 3

국어선생 최필영

by 안개바다

최필영이 영혼의 반쪽을 네팔에 놓고 왔다는 김수연에게 물었다.

네팔에서 말도 안 통하는데 뭘 해 먹고살 것인가. 심도 있는 질문에 김수연은 명쾌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이주하면 관광객들을 상대로 카트만두 외곽에서 작은 게스트 하우스나 관광 가이드를 할 거라 한다. 관련한 자격증도 준비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다며 자랑을 했다.

'나도 학교 그만두고 네팔이나 갈까.' 최필영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최필영은 지방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어쩌다 보니 중학교 선생이 돼있었는데, 선생질하는 것도 현실과는 괴리가 있어서 학생들의 머리에 링거를 꽂아놓고 정답만 주입하는 잔인한 교육방식에 현기증이 난다고 했다.

눈부신 봄날엔, 공부만 하는 것은 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 진달래를 보러 갔고, 가을비 내리던 오후에는 아이들과 책을 덮은 채 빗소리를 감상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성적 올리는 것엔 관심 없는 듯 보였기에 교장이나 학부모들 사이에선 능력 없는 교사로 왕따 당하고 있었다.

학부모들 꼴 보기 싫어서 다 때려치우고 글이나 써서 먹고살아볼까 글도 썼지만 출판사들은 최필영의 수필이나 소설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원고 몇 줄 읽어보고 잘 팔리지 않는 글이란 이유를 달아서 돌려보냈다. 학생들에게는 존경받는 교육자라는 것과,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이력은 글을 돈으로 만드는 것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도저도 되는 일이 없자 최필영은 요즘, 전국에 있는 시골 복덕방을 찾아다니고 있던 터였다. 작은 산 하나를 사서 두문동처럼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책 속을 기어 다니는 좀벌레처럼 살다가, 책 속에 갇혀 죽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다.

김수연은 이런 성향의 최필영에게 깊은 호감과 연민을 느꼈다.
부처님 법문 같은 최필영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자신의 전두엽에 남아있던 더럽고 구역질 나는 기억들이 순백으로 정화되는 것 같다고 한다.


"노총각 선생님 저와 데이트하실래요?"

김수연이 최필영에게 놀리듯 말한다.

"일없수다. no총각이면 내가 총각이 아니란 말인데, 아니 그런데 내가 총각이 아닌 걸 어떻게 알았지? 이 나이 먹도록 여자랑 딱 한 번 자봤어요. 그것도 고등학교 때 매춘부랑, 친구와 나는 첫 경험이 같은 여자야 푸하하."

최필영의 원색적인 농담에 얼굴이 빨개진 김수연은 허리가 뒤로 젖혀지며 웃었다.

"나는 존재감, 자존감, 자신감보다 강한 감을 가지고 있지, 뭐냐 하면 다른 감들 하곤 출신 성분조차 이질적인 열등감 하하하."

"호호호."

"수연 선배 필영이 형 농담이 재밌냐? 유치하구만."

내가 말했다

"냅둬 우린 이렇게 웃다 죽을 거야 호호호."

최필영도 김수연과 대화를 할 때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아카시아 피던 5월의 어느 날 밤 최필영은 김수연의 자취방에서 하룻밤에 만 리나 되는 길고 긴 성을 쌓고 네팔에 같이 가기로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김수연이 이혼녀라는 것은 최필영에게 가십거리도 되지 않았다.

"이 선생! 아저씨가 쌀집에 한번 들르래 국어선생 소개해 준 거 고맙다고 술 한잔 산데 언제 같이 가자."

김수연이 이젤 옆으로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한다

"고맙긴 뭘 미생물이 미생물 하나 연결시켜 준 것밖에 없는데."

"이 선생이 미생물이고 필영 씨도 미생물이면 나는 뭐야?"

"수연 선배는 고등동물!"

김수연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네팔 가서 살면 꼭 놀러 와야 해, 필영 씨하고 항상 기다릴게."

김수연의 눈동자에 뜻 모를 눈물이 반짝거렸다.


두 사람은 네팔을 일 년에 서너 번은 다녀왔다. 네팔에 살집도 마련해 놓았고 작은 교회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도 올렸다.

오늘 김수연과 최필영, 쌀집 아저씨와 함께 옥탑 화실 평상에서 마지막 술을 마셨다.

모두가 떠나면 겨울이 온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숨죽이는 계절.

해바라기 소피아 로렌만이 가을의 끄트머리에서 잘 가라 인사를 했다.

텅 빈 가슴, 늑골 사이로 찬바람이 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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