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그날은 가을인데도 비가 엿같이도 많이 오는 날이었다. 첫 직장에 들어갈 때 산 정장 바지 단이 젖어 발목에 들러붙었다. 우산이 의미 없는 기분이 들 때, 지하철역에 다다를 수 있었다.
플랫폼에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다. 분명 지내본 환경이지만 어색한 풍경. 저마다 비 맞기 싫어 큰 우산을 갖고 옷이 젖을까 띄엄띄엄 서 있다. 날씨만큼 화가 나는지 험상궂은 얼굴들.
사람들이 물 찬 양동이를 쏟은 듯, 밀려 나오고 다른 사람들이 되감은 듯 밀려 들어간다.
그 물방울 중 하나 지혁. 가까스로 선 자리엔 큰 골프 우산 승객이 양옆이다. 바짓단을 넘어 허벅지까지 젖는 바지. 핸드폰이 진동한다.
- 지혁님의 지원에 대단히 감사드리오나,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먼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만의 외출도 물거품이다. 이어폰을 낀 채 화면에 파묻힌 양옆의 사람들. 우산은 전철이 흔들릴 때마다 자동 세차장 유리닦이 마냥 다리를 쓸고 있다.
“하-”
깊은 한숨을 쉬는 지혁. 속이 참을 수 없도록 갑갑해져 온다. 사방의 사람들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열린 문으로 우발적으로 튀어 나간다. 딱 붙어있던 양옆의 승객과 그 옆의 승객들이 부딪혀 휘청인다.
“아이 씨, 뭐야...”
볼멘소리가 뒤에 들리는 듯하다. 알 필요 없다. 사장에 모래알끼리 누가 누구를 기억하겠는가.
다짜고짜 지하를 나온다. 해가 지는 젖은 도로엔, 이제 온갖 라이트가 대각선으로 죽 찢겨 번져있다.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면접비가 삼만 원 들어왔다. 젖은 몸엔 살짝 오한이 오기 시작했다.
‘술. 술이다.’
오래된 도보가 움푹움푹 파여 웅덩이가 곳곳에 있다. 이래저래 피했으나 결국 밟아 물이 튄다. 이젠 양말까지 젖어 들어가고 있다.
아무렇게나 사람들이 많이 들어선 작은 어묵집에 들어간다. 싱글싱글 웃는 회사원들. 나란히 앉은 연인들. 퇴근 시간 낑겨 가기보다 시간을 보내고 가는 것이 현명할지도 모른다.
굵은 팔에 문신을 새긴 식당 주인. 깔끔히 친 짧은 머리에 허리춤엔 앞치마를 메고 주문을 받으려 기다리고 있다.
“1인 모듬오뎅하고 온사케 도쿠리 주세요.”
넵- 하고 성량 좋은 대답을 하고 돌아선다. 잔에 물을 따라 마신다. 아까의 주인과 직원 한 명이 운영하는 주방. 그들이 분주해 바 테이블에서 눈치 보지 않고 그들이 일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전엔 사케라고 하면 비싸다고만 생각해서 먹을 엄두도 못 냈는데. 이젠 일식집도 정말 많구나.’
어쩌면 인테리어는 일본보다 더 일본스러운 것 같다. 노래까지도 잔잔하게 일본어가 들린다.
음식이 나왔다. 작은 양초 포트를 두고 그 위에 야트막한 솥에 오뎅이 담겨있다.
“도쿠리 나왔습니다.”
천에 병목을 감싼 아츠캉. 천을 쥐고 한잔을 따른다.
‘도쿠리 한 병을 더 먹으면 대충 3만 원이겠군.’
잔을 들어 마신다. 뜨끈하게 혀를 따라 넘어가는 술. 달짝하다. 속이 살짝 뎁혀진다. 오한이 멎는다. 그러자 발과 발목의 불편함이 다시 느껴진다. 신발과 양말을 벗어버리고 싶지만, 민폐를 끼친다는 생각이 들어 포기한다.
어묵을 간장에 찍어 먹는다. 사실 쑥갓 구운 무, 유부 주머니 같은 요소를 제외하고 맛을 따진다면 포장마차와 별 차이는 없다. 마케팅 사례 어쩌구저쩌구하던 대학시절의 발표가 생각난다.
‘나는 마케팅 실패사례인가?’
킥킥 웃는다. 다시 한 잔을 따라 들이킨다. 국물을 떠 마신다. 이제 잔잔한 일본어 노래도, 회사 대리님, 인턴, 사원 거리던 말도, 이직과 연봉이 어떻니저떻니 하던 연인의 말도 흩어진다. 앞의 주방도 보이지 않는다. 또 잔을 들이킨다. 즐겁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본다. 빗물이 구두 안에서 즙처럼 쭉 나왔다가 다시 천으로 스며든다.
킥킥킥.
“사장님. 도쿠리 한 병 더 주세요.”
“네-”
기운차게 대답을 하고 포스기를 찍는 사장. 덩치가 좋은 것이 몸쓰는 일을 하다 밑천을 모아 가게를 차렸나? 뒤의 직원은 아르바이트겠지? 또 한 잔을 마신다. 혼자 마실 때는 속도 조절이 어렵다.
“아 국물 더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쿠리를 놓고 가는 점원은 곧바로 오뎅 국물을 더 넣어준다. 과거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하하하.하하하. 이제 병목의 천이 필요없다. 병을 잡아도 뜨겁지 않다. 쭉 찢어진 빛을 보다 보니 나도 내 계획도 이렇게 늘어졌나? 난시는 대부분 있다며. 코가 삐뚤어져서 그런가? 쭉 뻗은 코가 앞길을 쪽바로 가게 한댔는데. 하하하. 잔을 든다. 병을 든다. 젓가락을 든다. 다시 잔을 든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사람 좋게 웃는 사장. 마주 인사를 하고 나간다. 우산이 가득 꽂혀있다. 내 우산은 편의점 삼단우산이다. 목을 쭉 안 빼고 넣어놓아 멋진 꼬부랑 우산, 골프 우산, 브랜드 우산 아래에 파묻혀있다. 에잇.
제일 비싸 보이는 자동차 로고 우산을 편다. 비가 적게 오는지, 우산이 커진 탓인지 발목에 비가 덜 맞는 것 같다. 흘긋 뒤돌아봐도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쉽게 휘청이지 않는 탄탄한 우산.
다시 지하철역으로 내려왔다. 역무원에게 간다. 무심히 모니터를 보고 있다.
“저기요, 여기 이 우산이 버려져 있어서요.”
“아 두고 가시면, 분실물센터에 맡겨놓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열차가 들어온다. 왜인지 신이 난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에 맞춰 구두 앞코로 박자를 탄다. 양동이에서 물이 덜 쏟긴다. 부지런한 청소부가 그간 많이 퍼 날랐나 보다. 전철에 들어선다. 앉을 자리는 없어도 설 자리는 있다.
어둠 속을 두 눈으로 쏘아 가르고 나아가는 전철.
‘아, 전철이 나를 싣고 영원히 나아갔으면 좋겠다. 순환선을 탈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시간이 되면 전철은 멈추니까.’
앞의 승객이 일어나 자리가 났다. 전철에서 가장 편한 가장자리. 의자에 몸을 뉜다. 이어폰을 꺼낸다. 이따금씩 들리는 도착역 안내가 듣기 싫다. 아무 음악이나 틀어 잔뜩 키운다. 눈을 감는다. 내 집은 끄트머리니까 대충 일어날 수 있겠지. 왜 이 도시의 끄트머리는 전철 자리만큼 안락하지 않나? 킥킥킥. 이제 생각도 느려진다. 전철의 가벼운 흔들림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눈을 감았으니 전철이 아니어도 되잖아. 생각한다. 가족여행을 가며 창밖을 보다, 까무룩 잠든 여름을 떠올린다. 그날 어린 나는 차가 달리다 둥실 날아오르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