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릿재의 노을을 마주하다
으름 농장도 보고 친구부인이 바리바리 싸준 싸리버섯과 가지를 싣고 석천리 빠져나와 옛고개 천등산 줄기속 다릿재 고개를 넘어오다 만난 노을들이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이고 내 뒤숭숭한 달랠겸 그냥 다릿채 터널을 버리고 다릿재 고개를 택하고 넘는데 예전에 그 많이 넘던 차들은 보이지 않고 생명력을 잃은 아스발트 도로들만 쓸쓸히 늙어가고 있었고 키자라고 우거진 나무가지들만 도로 하늘을 덮고 있었다.
그야말로 쓸쓸하게 구비구비 늘어진 도로들도 늙어가는 중이었다. 다릿재 정상부근에는 어느 기업이 한구석 비스듬이 별장인지, 연수원인지 지어 쓰고 있었고 새어나는 불빛들의 규모로 봐서 제법 폼재는 주인들일것 같았다. 다행인것은 다릿재 고개의 생명력을 유지해 주는 정도는 될듯 싶었다.
다릿재 터널 뚫리기 전에는 단양의 시멘트 트럭들이 가쁜숨의 검은 매연들을 드르렁드르렁 토해내며 오르내리던 구비길이었고 우리는 산척면 소재지를 꼭 이 다릿재 고개를 넘어야 갈 수있었다. 버스로 넘고 자전거로 넘고 걸어서 넘었던 생명의 고개였다. 반짐발이 자전거 한대로 세명의 장정이 올라갈땐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고 정상에서는 앞뒤로 한명씩 태우고 내려가다 속도 가중으로 브레이크줄 파열로 죽을뻔한적이 두번이나 있었다. 청소년 시절이다. 그때 검은 숨을 붕붕 토하며 마주 올라오는 트럭을 부딧치기를 피해서 산쪽으로 자전거를 처박아 셋다 중한 찰과상을 입기도 했던 도로다. 그래도 며칠 여기저기 쑤셔도 병원을 모르던 시절이다. 암튼 다릿재 사연은 너무도 많다.
그 다릿재 정상을 지나 내려오다 보면 산척면 소재지가 휀히(나무들이 우거져 잘 찾아서 봐야)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한구비를 더 돌아서니 서향 하늘이 드러나고 키자란 나무들 사이로 노을이 참 아름답게 펼쳐져서 한동안 넉놓고 바라봤다. 지금내 영안의 통증들이 거기에 발갛게 펼쳐저 있었다. 그 고개 도로에서 50년만에 만난 노을이다. 내 무거운 영안의 통증들이 그렇게 서향하늘에 펼쳐지고 있었다. 가난이 병이어도 아프지 않던 시절의 노을이나 다성숙해 영이 아파서 마주하는 노을이나 아름다운 통증은 다 비슷하다.
다릿재의 노을에 흠뻑 빠져본 날이다. 바로 그 노을 안주삼아 삶에 노고들을 잠시 노을에 널어놓고 얼굴이 벌겋게 취하도록 막걸리를 마시고 싶었으나 음주때문에 안되고 집에와서 친구가 준 으름주로 그날의 회한과 노고를 함께마셨다. 세상 고단, 즐거움 다버릴수 없으니 그게 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