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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시유 Oct 15. 2024

어느 인도 왕의 지혜

 또다시 남인도에 위치한 아쉬람을 찾았다. 1년 반 전 이곳 아쉬람에서 크리야 요가를 배웠었다. 그 후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수련을 하니 어느 날 나의 몸과 영혼이 이제 다음 단계를 수련해 보면 어떻겠냐고 물어왔다. 그래서 다음 단계의 수행법을 전수받고자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아쉬람은 여전히 따뜻한 햇살이 가득했고 사방엔 푸르른 초록빛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다.



아쉬람엔 구루지와 수행자, 자원봉사자들을 모두 포함하여 하루에 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람은 매우 고요했다. 다들 각자 수행에 정진하느라 수다 떠는 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단체로 고요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 참 묘한 기분이 든다.


 노자가 홀연히 떠났다던 곳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아쉬람은 깨끗한 공기, 깨끗한 물, 유기농 식재료로 요리한 건강한 음식들, 각자 수련에 집중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너무 완벽해서 지금 이 순간이 참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바로 짜이(우유와 설탕을 넣어 끓여만든 인도식 밀크티)를 마실 수 없다는 것이다.


채식하는 것도, 소식을 하는 것도 나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맨 처음 인도에 왔을 때부터 매일같이 짜이를 마시다 보니 어느 순간 습관으로 굳어진 게 화근이었다. 나에게 짜이 없는 아침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카페인, 우유(지방) 그리고 설탕이라는 환상적인 조합은 뇌를 즉각적으로 자극시킨다. 그리고 이 자극과 보상이라는 중독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가 매우 힘들다.


내가 머물렀던 아쉬람에선 우리의 신체와 마음을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이 일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이곳에선 카페인이 들어간 커피나 차를 마시는 행위도 금지되어 있다. 한국의 사찰요리에서도 스님들의 수행을 위해 오신채(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를 사용하지 않는데 이곳에서도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자극할 수 있는 식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이미 오랫동안 카페인+지방+설탕이 주는 쾌락에 빠져있었던 나는 이튿날부터 금단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의 몸은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짜이를 왜 주지 않냐며 자체 파업을 해버렸다. 몸이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고 자꾸만 내 가방으로 시선이 갔다. 가방 속엔 혹시 모를 비상상태에 대비해 챙겨 온 인스턴트 짜이가 나 여기 있다며 나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가방문을 열고 짜이를 꺼내, 그리고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면 돼. 어렵지 않아.’라고 내 안의 목소리가 자꾸만 나를 유혹해 왔다. 짜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자 자꾸만 더 생각이 났다. 달달함이 선사하는 쾌감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안 돼… 안 돼… 이러면 안 돼….’를 외치다 결국 나는 가방 안에 있던 짜이로 손을 뻗었다.


‘뎅-’

그 순간 뇌를 뒤 흔드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녁 명상 시간이 곧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아쉬움 마음과 안심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야외 명상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곳에서 해질 무렵, 때로 명상 중에 무한한 황홀경에 빠지기도 한다. 그 황홀경에 머물 때에는 짜이도 생각 속에서 사라진다. 늘 머릿속을 어지럽시던 생각 자체가 우주 속에 녹아들어 자취를 감추어버린다.


단체 명상이 끝나고 나는 나의 구루지를 찾아가 짜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며 나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구루지는 자식이 없었던 어느 왕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오래전 인도에 자식이 없던 왕이 있었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왕위를 물려줄 자식이 없자 왕은 고민 끝에 온 세상에 다음과 같이 알렸다.


"왕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번주 일요일, 궁전 앞 공원으로 모이시오. 공원을 찾은 사람 중 한 명이 왕이 될 것이오."


왕이 된다니! 백성들 중에서 왕을 뽑는다는 이야기에 온 세상이 왁자지껄해졌다. 모두가 왕이 되고 싶어 했다. 다들 일요일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일요일이 되자 다들 한껏 기대에 부풀어서 공원을 찾았다.


그런데 공원엔 출입문이 단 한 개밖에 없었다. 공원에 들어가려면 그 작은 출입문을 지나야 했다.


그런데 출입문 양옆에 푸드트럭들이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며 공원에 모인 사란들의 후각을 자극했다. 그곳엔 전 국민이 좋아하는 빠니 뿌리(인도에서 가장 사랑받는 길거리 음식)와 값비싼 향신료가 들어간 요리, 최고급 양고기 스테이크 등 온갖 진귀한 음식들이 가득했다.


푸드트럭에서 요리를 하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이 음식들은 모두 무료입니다! 이곳에 오셔서 마음껏 드세요!"


결국 왕이 되고자 공원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입문을 들어가기도 전에 음식의 유혹에 빠져버렸다. 그들은 허겁지겁 배를 채우며 음식이 주는 쾌락을 한껏 느꼈다.


공원을 찾았던 사람들 중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냐.. 우린 지금 왕이 되러 온 거지 이 음식들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며 출입문을 지나왔다.


출입문을 지나자 이번엔 옷, 신발, 가방, 시계, 액세서리가 가득한 상점들이 나타났다. 그중엔 돈주고도 못 산다는 단종된 명품 시계도 있었고, 1년은 기다려야 살 수 있다는 명품백도 있었다. 음식의 유혹은 간신히 참았지만 명품 앞에서 무너진 사람들은 자신이 평생 꿈꿔왔던 백을 어깨에도 매보고 시계도 손목에 차보며 명품으로 치장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데 여념이 없었다.


간신히 명품거리를 빠져나온 33명의 사람들은 '왕이 되려고 이곳에 왔던 우리의 본분을 절대 잊어버리지 말자'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그러자 이번엔 슈퍼카가 나타났다. 람보르기니, 맥라렌, 페라리 등의 슈퍼카에 묻혀 BMW랑 벤츠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평생 죽어라 일을 해도 절대 사지도, 아니 타보지도 못할 차들의 유혹에 절반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넘어가 버렸다.


이제 12명만이 왕이 되기 위해 다음 장소로 걸어갔다.


그다음 장소는 그 규모가 지금까지 지나온 장소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으리으리하게 컸다. 바로 집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2층 집, 전원주택, 펜트하우스, 아파트 등 모든 백성들이 꿈꿔왔던 드림 하우스가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장식된 집들이었다. 게다가 모두 공짜였다. 집이주는 안락함과 안전감, 그리고 동시에 럭셔리함과 풍요로움에 빠져 12명 중 11명이 왕이 되는 것 대신 집을 선택하고 말았다. 집을 선택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평생 꿈꿔왔던 집에 살게 되다니! 이젠 왕도 더 이상 부럽지 않아. 우린 그냥 이 집에서 행복하게 살겠어!"


결국 왕이 되고자 전국에서 몰려든 백성들 중에서 딱 한 명만이 최종 관문에 도달하게 되었다.


마지막 관문은 놀랍게도 자연 속에 있는 사원이었다. 고요한 사원엔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그리고 사원 끝에 한 사람이 서있었는데 바로 왕이었다!


왕은 맛있는 음식, 아름답고 멋진 명품과 시계, 눈이 휘둥그레지는 슈퍼카, 모두가 꿈꿔온 꿈의 아파트와 펜트하우스의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이곳까지 온 그 사람에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방으로 돌아온 나는 가방 안에 있던 짜이를 미련 없이 버렸고 마침내 편히 잠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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