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3인분을 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7일간 히말라야를 등반하며 먹은 것이라곤 짜이, 비스킷 그리고 매기(카레맛이 나는 인도식 라면)뿐이었다.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먹었다. 나는 배가 몹시 고팠고 매우 지쳐있었다. 평소 동네 뒷산도 안 오르던 나였기에 히말라야가 이렇게 험난한 곳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비상식량 하나 없이 히말라야에 온 사람은 아마 나뿐이리라. 무식해서 용감했다는 누군가의 말이 새삼 떠올랐다.
델리로 돌아가는 버스는 밤이었다.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식당 옆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 잠깐 눈을 붙였다. 배를 가득 채운 뒤 침대에 누우니 바로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잤을까...
갑자기 속이 너무 울렁거렸다. 뭐지? 아까 먹은 음식 때문일까? 며칠간 굶다가 갑자기 과식을 한 탓일까?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2층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
'이렇게 난 죽는구나. 다행히 먹고 죽은 귀신이라 때깔은 곱겠네... 아.. 근데 먹은 게 지금 다시 밖으로 나오고 있네?'
토하는 와중에 잠이 쏟아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살다 살다 토하면서 졸긴 처음이었다. 어느 정도 속을 비워내고 다시 기절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배에서 꾸룩꾸르룩하는 천둥번개 소리가 났다. 간신히 올라온 침대계단을 부여잡고 다시 내려왔다. 하필이면 2층 침대의 위칸을 배정해 준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몇 차례 더 화장실을 가기 위해 2층 침대의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위. 아래. 위위 아래. 위. 아래. 위위 아래. 버스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심한 갈등이 느껴졌다.
'이대로 버스를 탈 수 있을까...? 1시간도 아니고 12시간인데?'
하지만 내일 델리에 도착하면 그다음 일정이 빼곡히 잡혀있었다. 하루 전이라 스케줄을 변경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고 심한 고민 끝에 결국 버스를 타기로 결정했다.
본능적으로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출발하기까지 10분 정도 남았기에 짐을 내려놓고 화장실부터 갔다. 바지에 똥을 쌌다느니 버스 안에서 누가 토를 했다느니 그런 류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나한테 일어날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나한테 일어나선 안될 일이다. 아름다운 히말라야는 제발 신비롭고 아름답게 남아주렴. 속으로 내가 아는 모든 신을 다 소환했다. 이때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인간은 위기에 몰렸을 때에만 신을 찾는다는 것을.
인도엔 돈을 받는 화장실도 있고 돈을 받지 않는 화장실도 있다. 돈을 받는 화장실에 가서 돈을 내면 휴지를 3칸 정도 뜯어준다. 혹은 내가 볼일을 다 보고 나오면 뒤를(?) 봐주시기도 한다. 근데 방금 너무 급하게 나오느라 현금을 버스에 놓고 내렸다. 버스까지 갔다가 다시 오기엔 괄약근 사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 괄약근이 '자기야, 난 여기까지야-! 더 이상은 안 돼!' 라며 아래에서 급박하게 외치는 것이 머리끝까지 울려 퍼졌다.
다른 방도가 없었다. 화장실 앞에 서있던 소년을 밀치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는 수밖에...
그런데 맙소사....
너무 급해서 일단 바지부터 내리자 동시에 괄약근이 풀어져버렸다. 아직 변기까진 두 걸음 정도 남았는데... 이를 어째... 그 와중에 안심이 되었다. 낯선 땅이었기 때문에 이곳엔 나를 아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아는 자도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아무한테도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 좌절스러운 순간에 이 사실 하나가 나의 에고를 방어해 주는 것을 보며 인간의 자아 보호 시스템은 실로 대단하다고 느꼈다.
들어올 땐 뛰어 들어왔다 쳐도 이번엔 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돈도 안 내고 들어왔는데 화장실 바닥에 테러를 해버렸으니.. 그 소년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화장실엔 휴지도, 물도 아무것도 없었다. 주머니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꼬깃꼬깃 접어 넣은 6칸짜리 휴지가 전부였다.
일단 정신줄을 최대한 놓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육체와 혼을 최대한 분리시켜 몸은 여기 있지만 혼은 여기에 없기를 의도했다. 육체와 혼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이 순간이 기억 속에서 삭제되길 바랐다. 그리고 소년과 얼굴은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버스로 걸어갔다. 누가 멀리서 보면 '저 사람은 꽃게처럼 옆으로 걷네?' 했을 것이다.
버스에 돌아온 난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버스가 연착이 되어 20분 뒤에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위액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다시 화장실을 가야 했다.
입을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또다시 달려갔다. 인생이라는 영화 필름을 돌려 볼 수 있다면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한 꼴이 되었다. 마치 재연배우가 재연하듯 반복하였다.
1. 화장실로 뛰어간다.
2. 급하게 나오느라 현금이 없다.
3. 에라 모르겠다. 화장실 앞 소년을 밀치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어? 화장실이 깨끗해졌네? 내가 테러한 바닥이 깨끗해져 있었다 화장실을 지키던 그 소년이 내 테러흔적을 그새 깨끗하게 치워주었다. 너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났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잠시 후 버스 기사아저씨가 승객을 한 명 한 명 확인하면서 동시에 위생 봉투를 나누어주었다. (인도에선 장거리 버스를 타면 혹시 모를 멀미에 대비해 위생봉투를 나누어준다.) 나는 힘없이 웃으며 검지 손가락 하나를 꼳꼳하게 폈다.
'한 장 더... 주세요...'
기사아저씨는 대략 내 상황을 눈치챘다는 듯 인심 좋게 한 장을 더 내어주셨다. 난 위생봉투 총 3장을 받아 들고 맨 뒷자리에서 모든 팔걸이를 제쳐 올리고 누웠다. 다행히 승객이 많이 없어서 맨 뒷좌석에 혼자 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대로 깊이 잠이 들기를.. 그리고 눈을 뜨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마을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든 버스가 갑자기 쿵- 쿵- 소리를 내며 엉덩이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맨 뒷좌석에 있던 나는 그 흔들림이 배로 느껴졌다.
'어 뭐지..? 낯설지 않은 이 느낌은...!'
갑자기 디스코팡팡이 떠올랐다. 오래전에 인천 월미도에 놀러간 적이 있다. 월미도엔 여러 놀이기구가 있었는 데 그 중에서 디스코팡팡이 가장 인기있어 보였고 나도 궁금하여 한 번 타보았다. 지금 이 버스의 흔들림은 그때의 느낌이랑 매우 흡사했다.
디스코팡팡은 원반형 기구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DJ가 들려주는 음악과 함께 빙빙 돌아가며 강하게 흔들리는 놀이기구이다.
그 당시 내 옆에 앉아계시던 여성분이 결국 못 버티고 자기가 앉은자리에서 떨어져 나갔었다. 그런데 DJ가 디스코 팡팡 기구를 이리저리 조작하자 갑자기 그 여성분이 맞은편에 앉아있던 낯선 남자의 무릎에 이상한 자세로 서게 되었다. DJ는 다 예상했다는 듯이 또다시 기계를 능수능란하게 조작하기 시작했고 그 여성분은 DJ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싸이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빤 강남스타일!)
그리고 그 옆에 앉아있던 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녀처럼 DJ의 꼭두각시가 되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수치를 당하다니,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다.
그때는 수치당하는 게 싫어서 안간힘을 쓰며 매달렸는데 오늘은 내가 더 이상 팔걸이에 매달릴 힘이 없었다. 위로도 내보내고 아래로도 내보내고 누워있다가 또 다시 변기앞으로 앉아있다가 또 다시 변기를 무한반복 하다보니 온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버렸다. 게다가 화장실을 제 집처럼 들락날락 하는동안 계속해서 수치를 느꼈다. 그런데 수치를 그냥 온 몸으로 기껍게 느끼다 보니 수치에 대한 저항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수치가 더 이상 수치로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의자에 누워있다가 떨어지면 떨어지는 거지 뭐.
화장실 앞 소년과 다시 마주쳐야 하면 마주치지 뭐.
버스 안에서 토가 갑자기 나온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바지에 똥을 싸게 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거지 뭐.
그냥 내게 일어난 모든 상황을 받아들였다.
수치를 느끼는것을 두려워해서 수치를 느끼길 피하려고 했던 나를 받아들였다.
수치 자체를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괄약근의 힘이 풀리듯 온 몸의 긴장도 함께 풀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자 몸과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자 하루종일 위아래로 뿜어대던 토와 설사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멈추었다. 저항하기를 멈추고 마음이 고요해지자 그제야 저 멀리 맑게 개인 신비로운 히말라야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은 예로부터 신들의 거주처이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히말라야가 오랫동안 무의식에 박혀 있었던 '수치'를 해소할 수 있도록 일련의 사건을 내려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맙습니다 산이시여' 속으로 속삭였다.
수치를 당할까 봐 두려워서 디스코팡팡의 난간을 부여잡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이곳에 없다.
난 이제 나의 수치를 온 세상에 드러내며 당당하게 살고 있다.
"나 히말라야에 똥쌌다. 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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