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저 노란색 천은 얼마인가요?"
인도 여행을 10년간 이미 수차례 한 나이다. 매 여행때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인도인과 온갖 실랑이를 벌였더니 제법 연륜이 쌓였고 그래서 상인과의 흥정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인도에서 가격을 흥정할 때 지켜야 할 첫 번째 원칙은 자기가 진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이 무엇인지 상대방에게 절대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내가 진짜 사고 싶었던 천은 옴(ॐ)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는 보라색 천이었다. 옴은 신비스러운 단일 음절 만트라로 모든 만트라의 근원이 된다. 신비스러운 우주의 소리가 그려진 저 천을 내 명상원에 걸어놓으면 우리 명상원의 신성함이 더욱 돋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흥정을 위해서 내가 진짜 사고 싶었던 옴이 그려진 보라색 천 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 대신 12개의 별자리가 그려져 있는 노란색 천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며 가격을 물었다.
"7000"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 걸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천 가게 주인 7000루피를 불렀다. 한화로 11만 원이 넘는 가격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며 속으로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흥정에선 맨 처음에 부르는 가격이 흥정의 승패를 좌우하기도 하는데 처음부터 너무 높은 가격이 제시되었다. 나는 아얘 흥정하기를 포기해 버린 사람 마냥 옆가게로 발 길을 옮기며 떠나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떠나려는 내 뒷모습을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천 가게 주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우 머치!" 외쳤다. 상대방이 붙잡았으니 이제 게임은 내가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겠지 싶었다.
그래서 난 주인이 맨 처음 제시했던 가격의 1/10도 안 되는 300루피(4천800원)를 불렀다. 내가 생각해도 좀 양심 없는 가격이긴 했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 위해선 최대한 낮은 숫자에서 시작하는 게 유리했다.
내 가격을 들은 천 가게 주인은 갑자기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그 가격엔 절대 내어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저 12 별자리가 그려진 노란색 천을 300루피에 줄 수 없다면 300루피에 줄 수 있는 다른 천이 있나요?"
실제 판매 가격을 모르는 나로서는 천 가게 주인이 순간적으로 헷갈려서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기 전 가격을 실토해 내도록 유도한 질문이었다.
그러자 주인은 바닥에 놓여있던 나염 염색이 되어있던 얇은 스카프 같은 천을 가리키며 저건 300루피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진짜 사고 싶었던 옴이 그려져 있는 보라색 천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천 끝에 이물질이 묻어있고, 옴에 그려져 있는 저 점이 살짝 휘어있어서 완성도가 떨어져 보인다는 등 저 천에 대해 온갖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자가 많아서 그 누구도 사지 않을 이 천을 내가 인심 써서 사가겠다는 태도를 보이며 천의 가격을 물어보았다.
"6000"
6000루피(9만 7천 원)?! 내가 맨 처음 원했던 가격인 1500루피(2만 4천 원)보다 4배나 비싼 가격이다.
나는 바닥에서 폴짝폴짝 뛰며 이렇게나 하자가 많은 천이 그렇게나 비싸다니! 절대 그 가격에 살 수 없어요!라고 외쳤다. 그리고 떠나려는 시늉도 해보고, 관광객이 아닌 히피 여행자라 주머니에 든 돈이 얼마 없다며 불쌍한 표정도 지어 보이고, 고향에 계신 할머니 이야기도 꺼내보았는데 가격이 좀처럼 내려가지 앉자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최후의 수법을 동원했다. 100루피(1천6백 원)에 주면 당신의 가게에서 천 1장이 아니라 2장을 사겠다고 말했다. 말도 안 되는 논리이지만 간혹 이 술수에 넘어가는 순진한 상인들이 있어서 써본 수법이었다. 1개라도 더 팔고싶어하는 욕심이 있다면 내가 던진 먹이를 덥썩 물 터이다.
그러자 천 가게 주인은 어깨에 걸쳤두었던 작은 천으로 이마에 흐르던 땀을 닦아낸 뒤 한껏 누그러진 표정으로 내 손에 들려있던 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좋아요. 100루피에 당신이 원하던 이 천을 드리죠. 대신 당신이 가진 그 핸드폰을 나한테 100루피에 줄래요?"
100루피? 내가 가지고 있던 폰은 바로 아이폰이었다. 게다가 저장용량을 추가로 업그레이드하느라 200만 원이 훌쩍 넘는 돈을 주고 샀던 건데, 단 돈 100루피(1천600원)에 달라니! 이 천 가게에 있는 모든 천을 다 팔고 거기다 웃돈까지 얹어야 내가 가진 이 아이폰 한대를 겨우 살 수 있을까 말까 할 텐데. 나는 바닥에서 팔짝팔짝 뛰면서 이게 대체 얼마짜리인 줄 아냐며 가게 주인에게 호통을 쳤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다. 아이폰 한 대의 가격은 200만 원 정도 하지만 이걸로 글도 쓰고 사진도 찍고 코칭과 상담일까지 하고 있는 나에게는 이 아이폰이 나의 생명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생명줄과도 같은 나의 아이폰을 단돈 1천600원에 달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내가 얼굴이 빨개진 채 씩씩거리며 화를 내고 있는 사이 천 가게 주인은 오히려 더 평온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이 가진 그 물건은 당신에겐 매우 소중한 것일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100루피에 줄 수 없는 거겠죠? 당신의 아이폰이 당신에게 소중한 것처럼 제가 가진 물건도 저한테는 매우 소중하답니다. 제 얘기를 들으니 어떠세요?"
옴(ॐ)이 그려진 천을 팔던 주인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일깨워 준 가장 지혜로운 흥정의 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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