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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노아 Nov 27. 2024

낙관적 염세주의(中)

돈키호테

물감을 얇게 발라낸 듯한 달빛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작업실. 그 안에 선 그녀는 마치 하나의 초상화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역설 그 자체였다.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동시에 처절할 정도로 파괴된 존재였다. 사방에서 그녀를 짓누르는 네모난 작업실의 벽은 빛을 흡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명암을 만들어냈다. 그 빛은 그녀를 더욱 삭막하게, 더욱 초라하게 보이게 했다. 마치 천장이 서서히 내려와 그녀를 짓눌러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황폐함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빛났다. 단순히 반짝인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 빛은 마치 금박을 얹은 유리구슬처럼 환희에 찬 광채를 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무언가는 처연하면서도 도발적이었다. 한편, 그녀의 손은 현실의 잔혹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 터지고 부르튼 손등은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고, 그 새하얀 천 사이로 배어나온 붉은 핏물이 나무 붓의 손잡이에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그녀는 손이 닳고 헤져도, 붓을 내려놓지 않았던 것이다.

몇 시간이나 작업실 한가운데에 틀어박혀 캔버스를 마주하던 그녀는, 여명이 수평선에 희미하게 스며들 즈음, 작업실의 무거운 철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듯, 가늘게 떨리는 숨소리가 공기 중에 섞였다. 나오는 순간, 그녀는 낡은 재킷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담배갑을 꺼냈다. 능숙하게 라이터를 찾는 손놀림은 무의식적이었고, 금세 담배 끝에 옅은 불빛이 피어올랐다. 그 불빛은 그녀의 창백한 피부에 점점이 반사되어 뚜렷한 그림자를 그렸다. 얇은 쇄골 위로 새겨진 “Grand Guignol”이라는 레터링이 연기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망가져 있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그 파괴는 단순한 몰락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안에는 강인함, 혹은 생존에 대한 본능적이고 불가해한 의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무심히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은 느슨하면서도 결단력이 있었고, 마치 레퀴엠의 한 구절처럼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나는 담배 연기가 만들어낸 허공의 궤적을 따라 그녀를 쫓았다.

여전히 그녀는 오래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눈빛은 그것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눈동자는 설명하기 힘든 난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웃고 있는 것인지, 울고 있는 것인지 모를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야 겨우,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 것을 보고 웃음을 짓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작년 열여덟 살이었던 그녀와 올해 열아홉 살인 그녀는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 그것도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곳에서는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는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잔잔한 물결처럼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파트 현관 앞에 다다른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주위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회색으로 칠해진 도시와 단조로운 아파트의 벽면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관문 앞에 그녀가 손수 그린 꽃 한 송이가 있었다. 그 작은 색채 덕분에 적어도 그곳만큼은 무채색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여 현관 인터폰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그녀는 틈새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는 6층에 멈춰 있었다. 그녀는 버튼을 눌렀고,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조용히 서서 그녀의 존재감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요즘 작업은 어떻게 되어 가나요?"


내가 침묵을 깨고 말을 걸었다. 그녀는 나의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수 초간 다른 곳을 응시하다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 말인가요. 글쎄요. 그저 저 스스로 하는 작업이라면 잘 되어가고 있죠. 개인전을 열거나 그림이 팔리거나 하지는 않지만요. 그렇지만, 제가 세상과 함께 해야 하는 작업이 있어요. 그 작업은 이제야 막 시작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세상과 함께요?"


"네. 세상과 함께. 이건 저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는거에요. 하지만 그러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를 알고, 저를 이해해야 해요. 그렇지 않고선 이걸 성공시킬 수 없어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눈에서는 광기가 느껴졌다.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는지 모를 시선으로 텅 빈 허공에 머물러있었다.


"그래요? 그렇다면 저부터 동참할 수 있을까요?"


"음... 아직은 힘들거에요. 저도 아직 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눌 만큼 충분하게 제가 알지도 못하는걸요."


"아직 알지 못하신다... 그러면서 결국은 남에게 그걸 다 알려주겠다? 신기하네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과학자들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부분은 우리가.아직.알지 못한디. 다만 이러이러한 부분은 확실히다'고 하지 않던가요. 저도 동일한 맥락이에요. 저 약시 잘 모르지만, 제가 이해한 한계 내에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는 감정이 더욱 격해졌다.


"그... 그러니까 내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 그 인류들에게 알려야해요 그게 나의 숙명이고 그게 나의 의미이고그것이인간의인간관계를초월한그무언가

*띵*

엘리베이터의 신호음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녀도 폭주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이제야 알아챈 듯, 눈에 초점을 찾고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재밌네요."


"앗 그, 그런가요"


그녀의 얼굴에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죄송합...

"아, 그러면,


적막.


"먼저 말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칼 씨는 자신이 가는 길이 맞다고 믿으시나요? 제가 당신을 의심하는건 아니지만 보통의 사이비 교주들이 하는 말 같이 들릴 수도 있어서요. 대부분 사이비 교주들은 단순히 금전적인 목적으로 종교를 운영하기도 하니까요, 사람들이 적개심을 가지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에서요. 당신의 말 자체에도 자신이 선지자이며, 무언가 타인이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알고 있다는 내용이 있잖아요. 아무래도 의심을 받으실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그림을 그리는거에요. 예술은 만인에게 통하는 언어이기도 하고, 단순히 말로 보여주기보다는 시각적인 자료를 보여주는게 훨씬 낫잖아요?"


"하지만 칼 씨의 그림은 너무 난해해요."


*띵*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3층에 도착했다.


"나중에 말해줄게요. 좀만 기다려줘요."


그녀는 발자국처럼 그 말을 남기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3년 후의 그녀는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청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야위었다. 젖살이 빠져서일까 아니면 그저 가죽밖에 남지 않은 탓일까. 그녀의 광대는 볼품없이 툭 튀어나와있었다. 안그래도 얇디얇던 손목은 이제 정말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마냥 가볍고 연약했다. 뼈와 장기에 달라붙은 그녀의 피부는 전보다 더 창백했다. 그 쇄골에 새겨진 레터링은 어깨뼈에 의해 음영이 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녀의 눈이 더 충격적이었다.

그녀의 눈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가 남긴 상흔 같았다. 처음 마주친 순간, 사람들은 그 눈에 깃든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생명의 빛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의 동공은 끝없이 팽창하고 있었고, 그 깊이는 마치 천 년의 역사를 품은 채 입을 다문 우물처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그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는 어디론가 떠밀려 가고 있는 표류자와 같았다. 그 속에서 무언가 부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알 길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면, 눈가에 새겨진 피로의 흔적과 붉은 핏줄이 불편한 진실을 속삭였다. 그녀의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지만, 그 무게가 육체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눈동자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고요한 어둠은 기묘하게 흩어지며,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조작하는 것 같았다. 눈동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투과하려는 듯 집중했지만, 그 끝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한순간의 평온도, 안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따금 하늘로 향했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기원하거나 갈망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 시선은 마치 다른 차원의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공허하고도 무감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공허함 속에 도사리고 있는 긴장감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바람의 흔적처럼, 끊임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이 그녀를 바라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누구와 마주쳐도 그 시선은 이내 흩어졌고, 마치 눈이 직접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이 나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중얼거릴 듯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에는 간혹 알 수 없는 강렬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폭풍 속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생존자의 광기 어린 빛과도 같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잔잔한 안개처럼 슬픔이 내려앉아 있었다.그 슬픔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녀의 눈이 지나온 시간들이 응축되어 만들어낸 무언의 기록 같았다. 눈물은 흘러내리지 않았지만, 마치 억눌린 파도가 언젠가 큰 소용돌이를 만들어낼 것처럼, 그녀의 눈 속에는 폭발 직전의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 읽혀지는 이야기는 끝없는 갈증과도 같았다.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갈증이 아니었다. 그 갈증은 무엇인가를 찾으려 애쓰던 과거의 흔적과, 그것을 영영 찾을 수 없으리라는 깨달음이 뒤섞인 것이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고, 잃어버린 조각들이 빛과 그림자 사이를 떠돌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그 무엇도 제대로 붙잡지 못하는, 절박하고도 혼란스러운 무력감을 보여주었다.

가끔씩 그녀는 먼 곳을 응시하곤 했다. 그것은 단순히 시선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무언의 외침 같았다. 그녀의 눈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이 땅에도, 하늘에도, 그리고 어떤 현실에도 속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경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 경계는 그녀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깊은 고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 고독 속에는 희미한 흔적이 있었다. 그것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인간의 흔적, 그리고 어쩌면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작은 몸부림이었다.

그녀의 눈은 때때로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기쁨의 흔적이라기보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 하는 체념의 표현 같았다. 그 미소 뒤에는 무언가가 억눌려 있었다. 그것은 미완의 문장처럼 끝맺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고, 말해지지 못한 비명이었다. 그녀의 눈이 닫히는 순간조차, 그 눈꺼풀 뒤에서 어둠이 뒤엉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 속에는 언제나 작은 빛의 불씨가 살아 있었다. 그녀의 눈 속 깊은 곳, 어쩌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자리에는 아직 꺼지지 않은 불꽃이 존재했다. 그것은 그녀가 무엇을 잃었든, 무엇을 갈망하든 간에,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작은 증거였다. 그 빛은 연약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그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내면 어딘가에서,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그녀의 눈은 마치 비밀의 책과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왜곡되어 있었지만, 그 깊은 곳에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진실은 그녀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었고, 아마도 아무도 읽어내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눈 속의 어둠과 빛이 만들어내는 대비는, 모든 것을 품으려 하면서도 결코 다 품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 눈이 다시 한 번 무언가를 응시할 때,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그것은 두려움이자 경이로움이었고, 동시에 그녀가 품고 있는 세계에 닿을 수 없다는 체념이었다. 하지만 그 체념 속에서도 어쩌면, 그녀는 다시 일어설 길을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이."


그녀가 현관을 열고 들어왔다. 지난 3년 사이, 그녀는 나와 부쩍 친해져 있었다. 그녀는 종종 술을 사 들고 우리 집으로 왔고, 그럼 나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세웠다. 꽤나 희망적인 관계였다 - 아니 어쩌면 거래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내게 푸념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그저 끄덕이며 그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수척해진 것은 제법 근래의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적당히 마른 몸매 - 연예인같은 - 을 가진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였다.


"칼, 약은 그만 끊으라니까."


"뭐, 이 개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나만의 방식이랄까. 너무 뭐라 하지 마 맥."


그녀는 술에 약했지만 그럼에도 음주를 즐겼다. 보드카를 샷 잔에 따라 조금씩 홀짝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알콜 증기를 뱉어내려는 듯 긴 한숨을 내뱉었다가, 다시 깔깔거리며 일어나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어느새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사는 독특했다. 그녀는 술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줄곧 내게 와서 안겼다. 때로는 내 입술 위에 그녀의 입술을 겹쳐 올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평소에 외로운 나날을 보냈을 터이기에, 나는 그녀가 그렇게 하도록 놔두었다. 이제는 너무 말라서 내 위에 올라타도 별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조울증 환자처럼 내 무릎 위에서 쉴 새 없이 울고 웃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으며 위로를 건내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나 조차도 그녀와 진지하게 사귈 생각은 없거니와, 그녀는 나와의 관계를 가벼운 만남 - 내지는 친구 - 정도로 생각했다. 우리는 연인과 친구 사이 그 무언가였다.

그녀는 나를 삶의 틈새에 끼워 넣었다. 내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사람이라고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필요로 했다. 아니, 어쩌면 필요한 척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나는 스스로의 그림자를 확인하기 위해 드리운 빛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존재감은 분명했으나, 그것이 그녀에게 중요한지는 알 수 없는 그런 빛 말이다.

때로 그녀의 시선이 내게 머물 때, 나는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투과해 어딘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곤 했다. 그녀는 나에게 단 한 번도 기대를 걸지 않았고, 나를 자신의 삶의 축으로 삼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내 곁에서 자신을 시험하듯 어떤 감정을 탐색했고, 그 과정에서 나는 조용히 그녀의 실험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언제나 두 겹의 의미를 품고 있었다. 때로는 솔직해 보이는 농담 속에 깊은 경멸이나 자기혐오가 숨겨져 있었고, 때로는 가벼운 비난 속에 묘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엿보였다. 그녀는 나를 대할 때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 듯 보였지만, 그 거리가 그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지, 나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이용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이해하려 애쓰는 태도에는 분명히 익숙해 보였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말을 끊지 않을 것임을 알았고, 그 사실을 마치 안전장치처럼 활용했다. 그녀에게 나는 듣는 귀였고, 지켜보는 눈이었으며, 침묵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완전히 마음을 연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언제나 어느 정도 닫혀 있었다. 내가 아무리 가까이 가도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었고, 그녀는 그걸 아는 듯 슬쩍 미소를 지으며 나를 그 경계에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녀에게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필요로 하는 누군가의 역할을 맡고 있는 배우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그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 편이 서로에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 진리라는게 뭔데?"


내가 그녀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었다. 그녀는 3년간 나에게 반복적으로 대답했다. 세상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진리이며, 그것은 세상 모두가 알아야 할 것이라고. 그 외에도 그 진리가 무엇인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지에 대해 말했으나, 내가 그 말들을 이해할 만큼 영민하지 않아서인지, 그저 그녀가 횡설수설 하고 있던 탓인지, 그 말들은 내 기억의 구석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좋게 말하면 괴짜였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정신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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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anks

인터뷰 응해주신 이번 작품의 뮤즈, 밴드 나노말( insta : @band_nanomal)의 백노루양( insta : @100_noru)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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