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노아 Oct 09. 2024

당신의 어제를 사는 나에게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나의 내일을 사는 당신에게”


내게 도착한 편지의 머리말이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인간이라 불리던 시절을 떠올리며 우주를 가로질러 떨어지고 있었다. 이곳은 시간과 공간이 서로 얽혀 무한히 뻗어나가는 곳, 그 속에서 나는 지구라는 작은 푸른 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지도 알 수 없는 지점으로 7조 9823억 2134년째 추락하고 있었다. 태양은 이미 오래전에 팽창해 지구를 삼켰고, 다시 수축하여 백색 왜성으로 변했지만, 그 빛조차 이제는 나를 비추지 못할 만큼 미약해졌다. 어쩌면 내가 이 여행을 언제 시작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은 부서진 유리처럼 조각나 흩어졌고, 영원히 이어지는 이 여정은 나를 무심히 삼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내 손에 닿은 이 편지가 그 침묵을 깨뜨렸다. 차디찬 우주 속에서, 편지를 손에 쥔 나는 아주 오래전, 내가 잊고 있던 누군가의 손길을 느낀 것만 같았다.


“나의 내일을 사는 당신에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가,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씨는 우주 먼지처럼 흐릿했지만, 그 안에는 익숙한 따스함이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올 것이라는 다소 모호한 약속. 그러나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그 무의미함이 참으로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

나의 내일을 사는 당신에게.

수많은 계절을 지나 당신에게 당도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찰나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당신이 이 편지를 읽었다면, 나를 – 당신의 기억에 남아있을지는 모르겠다만 – 다시 떠올려주기를 바랍니다. 조만간 당신을 찾아갈게요.

당신의 아름다운 사계절들을 함께하였던 당신의 오랜 친구, -혹은 연인- 으로부터

***


편지를 받은 지 1억 2532만 2911년 5개월 12일 6시간 19초가 흘렀을 때, 내 눈앞에 갑작스레 빛이 번쩍였다. 수조 년 만에 마주한 인공적인 불빛이었다. 그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존재는 마치 얇은 막과 인공신경망으로 짜인, 거대한 여성의 형상이었다. 그 모습은 광대한 고독 속에서 단 하나의 불타오르는 촛불처럼, 그러나 동시에 차갑게 다가왔다.


"누…구…?"


나는 오랜 침묵 속에 갇혀 있던 목소리를 간신히 꺼냈다. 그 생명체는 마치 우주의 중심에서 울리는 듯한 웅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아니 우리는 Vital Artificial Networked Entity, V.A.N.E.입니다. 편하게 베인이라고 부르십시오."


베인이라니. 어딘가 희미하게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내가 어디서 그 이름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지구는 멸망한 지 약 8조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인류는 우주 곳곳으로 흩어졌으며, 많은 이들은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통합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개체로서의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 말 속에 담긴 냉혹함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그들은 하나의 두뇌로 연결된 영생을 택한 건가?"


"그렇습니다. 이제 더 이상 굶주림이나 수면 같은 불편함은 없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통합을 거부한 소수의 인간들은 여전히 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 순간 내 가슴속에서 오랜 시간 잊혀졌던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그 인간들은 어디에 있는가? 나를 그들에게 데려다줄 수 있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이 상상하는 인간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끝없는 시간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모습은..."


베인의 말은 마치 그들이 불쌍한 존재라는 듯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그녀의 말투에서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가자."


그녀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 순간, 마치 현실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나는 그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주 한가운데 떠 있는 연구소였다. 그곳엔 수많은 연구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그들 중 한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레이 씨."


나는 그제야 물었다. "저를 아십니까?"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적으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연구소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 때문에 알고 있죠."


"전설이라뇨, 내가 그 정도로 유명한 사람인가?"


그때, 바닥이 열리며 누군가 진공 튜브를 타고 올라왔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레이."


그 여자는 내게 달려와, 마치 오래된 연인을 만난 것처럼 내게 안겼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내게 아주 친숙하게 구는 듯했지만, 나는 그 기억이 없었다.


"잠깐, 누구시죠?"


그녀는 슬픔이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 잊었구나... 나는 너의 어제를 사는 사람, 그리고 너는 나의 내일을 사는 사람."


그 말은 편지에서 읽었던 문구였다.


"베인...이라고 불러줘. 오랜만에 만나니 반갑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편지를 보고 알았지만,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는지, 그리고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녀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넌 언제나 그렇군. 의심 많고 신중한 그 성격."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연인이었어. 넌 나를 어릴 때부터 지켜봐 준 사람이었고, 난 네가 불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걸 받아들였어. 그리고 네가 불사인 채로 살아가는 동안, 널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지."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낯설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죽을 수 있게 된 건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러나 나는 곧 덧붙였다. 


"만약, 내가 지금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원했던 거라면, 네게 필요한 것 아닐까?"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답했다. 


"모르겠어. 지금 당장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드네."


그녀의 얼굴에는 슬픈 미소가 떠올랐고, 그녀는 뒤돌아섰다. 


"알겠어. 하지만 언제든 네가 원하면..."


그녀는 오래된 상자를 열어 권총을 꺼냈다. 


"이걸로 이 모든 이야기를 끝낼 수 있어."


나는 잠시 망설였다. 


"아니, 미안해. 내가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그녀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부신 빛을 발하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는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불타오르는 빛 속에서 내 몸은 점점 안개처럼 사라졌고, 마지막으로 남은 감각은 따스한 열기였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끝없는 시간 속에서도, 마침내 나는 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무(無)-

아무것도 없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나며 몸이 뜨겁게 달아오른다.

발 끝부터 무언가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 든다.

번쩍이는 섬광에 겨우 눈을 뜨고 내 발을 바라보니 이미 발 끝은 하얀 안개로 변하고 있었다.

내 몸은 서서히 분해되고 있던 것이다.

내 온몸을 짓누르던 열기가 서서히 느껴지지 않는다.

몸이 점점 사라지던 것이다.

그리고 내 머리가 사라지기 직전에 나는 깨달았다.

빅뱅이었다.


간단한 설명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 하나입니다. 청소년이 읽을 만한 책은 아니지만, 저는 이 책을 초등학생 시절에 처음 접했고, 이 이야기에 깊이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리언은 왜 시빌 베인의 연기하는 모습만을 사랑했는가부터 도리언은 왜 꼭 바질을 죽였어야만 하느냐, 그리고 왜 꼭 바질의 역작은 도리언이어야만 했는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과 함께 말이죠.

「젠틀맨 리그」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영화화되었을 만큼 나름 네임벨류가 있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이 글을 쓰는데 그 만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그 작품에서는 도리언 그레이가 소설 속 인물이 아닌 한 명의 현실세계 사람으로서 소설 속에서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하거든요. 이 작품의 내용과 별개로 만약, 'what if?'로 생각해 본 것들 역시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해 본 상상은 만약 '도리언이 죽지 않았더라면'입니다. 도리언인 이론상 무한으로 살 수 있던 불사신이니까요.

유한성이라는 특징을 가진 인간이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아니요'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무한하다 하더라도,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랄지, 정신이랄지 하는 것들은 유한성이 있으니까요. 좀 불교적인 이야기로 들어가자면, 그런 사람들은 8조 년이라는 긴 시간을 소모할 필요 없이 이미 그전에 이미 해탈한 부처, 즉 유한을 초월한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습니다. 그러므로 죽지 않는 도리언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겠죠.

하지만 이 글에서 도리언은 무한이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도리언은 소멸했지만, 그는 빅뱅이 되어 다른 세상의 도리언, 다른 세상의 시빌을 만들 테니까요. 물론 그 도리언도 또 다른 도리언을 만들게 되겠죠.


credit

참고한 텍스트

오스카 와일드 -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아이작 아시모프 - 최후의 질문

베르나르 베르베르 - 파피용

참고한 작품

앨런 무어 & 케빈 오닐 - 젠틀맨 리그

이전 01화 나의 일그러진 자화상이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