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옆자리 김 차장님도 이런 시절이 있었겠지?
10년째 일기를 쓰고있는 내가 처음 자의로 일기를 쓴 것은 열아홉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대학에 합격한 3학년 문과 전교 1등 선배가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을 듣고서였다.
여러분, 10대는 다시 오지 않아요,
10대의 마지막을 기록해 보세요.
지금 생각하면 갓 대학을 합격한 열아홉 소녀가 이 이 말을 했다는 것이 너무 귀엽지만, 스물아홉에도 그 장면이 그대로 떠오르는 것을 보면 참으로 명문장이었다. 그 선배의 말이 맞았다.
매일 친구들과 부대끼며 보내는 학교생활과 온 세상의 주인공 같던 10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장난을 초단위로 치던 그 순간을 나는 거의 다 잊었다. 오직 일기를 써 두었던 그 순간만 어렴풋이 기억난다. 정말 소소해서 사건조차 아닌 그런 순간들이 사실 그 시절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는데도 나는 나를 슬프게 하거나 좌절시키거나 특별히 성취했던 사건들만 기억한다.
사주든 점이든 이야기를 들으면 일관되게 내게 하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많이 힘들었겠네. 그때 고생을 다 했어.' 까먹고 살다가 이런 말을 들으면, '아. 맞아. 나 꽤나 힘들었지'하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나름 살아낼 만했다. 아까 말한 정말 소소한 장난들 덕분에. 그리고 세상의 내가 주인공인줄 알고, 이 또한 내가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덕분에. 지금은 이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슬프고 질투 나기까지 한다.
평준화 지역의 고등학교는 양아치는 거의 없었지만 공부하는 친구도 거의 없었다. 공부를 (티 나게) 열심히 하거나 나대는 애를 다들 욕하고, 막 이성에 눈을 떠 주변을 훔쳐보기 바빴다. 그런데 나는 워낙에 나대는 성격에, 종종 이성에게 호감을 샀고 공부도 꽤 잘했다. 성격이 밝고 수업을 열심히 들어서인지 선생님들의 편애를 받기도 했다.(지금은 편애를 하셨던 선생님들이 조금 원망스럽다. 티 내지 좀 마시지...) 아주 또래들이 싫어하는 건 다 모았달까. 이런 아이가 뒷담화의 중심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한두 문장이 말해주듯 내 학창 시절은 세렝게티였다.
나는 피나는 노력, 말 그대로 피가 나는 노력이었다, 끝에 원하던 수준의 대학에 합격했다. 적당히 생존해 내던 열일곱, 열여덟을 지나 열아홉, 고삼을 맞이한 나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가장 큰 대원칙.
"돌아보고 싶지 않은 1년을 보내겠다."
1. 어차피 공부해도 기분 나쁘고 안해도 기분 나쁘다면, 공부를 한다.
2. 점심시간에 혼자 밥을 먹는다. 먹고 나면 바로 자습실로 향한다.
3. 렌즈를 끼지 않는다. (컬러렌즈도 아니었지만, 렌즈를 낀다=여가를 즐긴다였기 때문에)
최근에 모임을 하며 낭비되는 시간을 줄이고 목표하는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바운더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는데, 일기장을 열어보니 열아홉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참 기특하다. 이것이 내가 종종 '열아홉의 나를 지금의 내가 이길 수 있을까?' 하며 절망하고 질투했던 이유가 아닐까.
아마 대한의 청년이라면 모두에게 이 엇비슷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치열한 열아홉을 보냈던 사람이라면 "아 절대 고3으로는 못 돌아가. 그때만큼 열심히는 못살아."라고 말하지 않을까. 나는 이 말이 20대 초반에는 자랑스러웠지만, 이제는 너무 씁쓸하다. 내 인생에 더 치열한 순간이 오지 않는 걸까?라는 생각에 울적해진다.
그때의 비결을 또 하나 찾자면, 원칙뿐만 아니라 명확한 목표도 있었다는 점이다. 2014년에 ‘좋은 대학'은 (거의)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목표였다. 그런데 지금은 목표를 상실했다. 직업적 성공도 부동산도 돈도 명예도 딱히 불변의 목표가 아니다. 그리고 목표가 있더라도 열아홉처럼 앞만 보고 달릴 에너지가 남아있을까도 잘 모르겠다. 4년 차 직장인은 너무 연약한걸.
그래도 열아홉 말괄량이 덕분에 힌트를 얻었다. 원칙과 목표. 10년 간의 일기를 다 읽고 회고하면 목표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지나간 날보다 올 날을 기대해보기 위해, 이가 시릴 정도로 달릴 날을 다시 한번 만들기 위해 조금 더 읽고 써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