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해.
다 싫어.
끝없이 반복되는 우울도, 원인 모를 고통도 이젠 견딜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시간이 얼마나 됐더라. 기억도 나지 않아.
오늘도 기어이 찾아온 아침.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피해 이불로 온몸을 덮는다. 한껏 웅크린 채, 빛이사라질 때까지 그저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환했던 세상이 다시 어두워지고 몸에 공기만이 가득찰무렵, 갑작스레 참을수 없는 허기가 밀려온다. 별 수 없이 비틀거리며 굳어있던 몸을 일으킨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지만, 눈 앞에 보이는 건 오래 방치돼 다 쉬어버린 반찬과 먹다 남은 피자 뿐. 다 굳어 딱딱해진 피자 한 조각을 집어 입 안에 욱여넣는다. 급한 허기를 채우니 천이 물에 푹 젖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또다시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바닥으로 몸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를 내려다보는 커다란 눈. 묵직한 손으로 내 머리채를 잡고 욕을 퍼붓는 누군가.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나를 바닥에 팽개친다. 손을 싹싹 빌며 제발 그만해 달라고 애원하지만, 그런 나를 무시한채 자비없이 내 몸 곳곳을 밟아댄다.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점점 숨이얕아져가는 순간, 겨우 꿈에서 깨어난다.
창밖엔 거센 비가 쏟아지고 있다.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보며 한참을 멍하니 있다 또다시 올라오는 우울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차라리 비를 맞으면, 그래서 지독한 감기에라도 걸린다면 이 고통스러운 감정도 사라질까. 갑작스레 올라오는 충동에 신발도 신지 않고 문 밖으로 뛰쳐나간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비를 맞는다. 머리부터 시작해 목, 가슴, 다리, 발이 차례로 젖어간다. 몸을 감싼 우울이 모두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가만히 서있는다. 굵은 빗줄기가 온몸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도, 검은 속이 비워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셈이다.
비를 계속 맞아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있다.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 간다. 눈이 감기고 몸에 힘이 빠져가던 때, 머리 위로 파란 우산이 드리워진다. 몸을 아프게 찌르던 비가 사라지니 조금씩 돌아오는 정신.
누굴까?
힘껏 달려 도망갈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문득 우산의 주인이 궁금해진다. 그리곤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등을 돌린다. 한 남자가 걱정어린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흐릿하고 어두운 내 눈과 다른, 아주 선명하고 밝은 남자의 눈. 저 반짝이는 건 뭐지. 빛일까.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무언가가 있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검었던 속이 환해져가는 기분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남자의 손을 꼭 붙들고는 입을 연다.
“빛을 원해요.”
우리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