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두렵다. - 세바시 영상 제목 중-
세바시에서 이런 제목을 본 적이 있다.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두려운 연애‘
나는 이 글을 보곤 연애를 넘어서 모든 인간관계에 포함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인간관계에서는 늘 이런 이중적인 마음을 가지는 것 같다. 다가오는 것을 바라지만 정작 다가오면 상처받을지 두려워 밀어내는 모순.
만약 당신이 이런 모순을 속에 품고 있다면,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당신은 그저 사람이기에 다시 상처받기 싫은 마음을 가졌을 뿐이니.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무섭게 만든 그 사람의 잘못이지 마음을 열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마음을 열고 싶은 상대가 있다면 억지로 그 사람에게 마음을 열려고 애쓸 필요 없다. 정말 그 사람이 당신의 사람이라면 당신의 속도에 맞추고 기다릴 것이고, 당신의 사람이 아니면 떠나갈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관계가 그리 원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소문이라면 거짓된 소문, 부풀려지고 왜곡된 소문들로 가득했고, 세상은 사실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나도 세상을 보는 데에는 색안경을 끼고 보며 기대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경계했다. 그러다 언젠가 나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도 경계심이 떠나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오는 거부반응이 줄어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고, 다가오면 받아주고, 인간관계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조절력이 생겼다. 무엇이 나를 인간관계에서 용기를 낼 수 있게 했을까.
장거리 육상을 보자. 지금은 작가를 꿈꾸는 나도 작년 이맘때쯤 800m 남자 육상경기를 나간 적이 있는데 훈련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서 내 페이스를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앞사람만큼은 잡겠다고 애써 뛰고, 결국 내 페이스대로 뛰지 못하고 지쳐버리기까지 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기록도 2분 40초라는 만족스럽지 못한 기록이 나오고, 꼴등을 했던 기억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볼 때 난 타인을 보았기에 결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만약 내가 내 페이스에 맞추지 못하였더라면 나는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압박감, 그리고 더 많은 사람에게 억지로 주었던 정에 되레 지치고 상처만 더 짙어졌을 것이다. 위선적인 관계 속에서 두려움만이 나를 가득 채워 더 불안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 앞에 있는 사람을 따라잡아야 할 것 같다는 사회적 분위기와 나의 불안을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 각자의 속도대로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당신도 타인에 의해서 당신이 뛰어야 할 속도가 결정되고, 쫓기며 뛰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정한 좋은 관계란 이런 것이다. 당신은 당신으로서, 상대방은 상대방으로서 각각 다른 사람이 하나하나 알아가고 맞추어 나가는 것. 잘 맞는 부분이 있다면 맞지 않은 부분도 있기 마련이고, 이 걸 맞춰 나가는 것이 관계이다. 그러니 그 사람이 원하는 모습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또한 타인에게서 나의 존재를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당신은 그 누구로부터가 아닌 스스로 존재하고 있는 빛나는 존재니깐.
그러니 앞서가는 그 사람을 의식하여 따라잡아야 내가 드러난다는 생각에 애쓰지 말고, 그저 묵묵히 내 옆에서 함께 뛰어주는 나의 편, 나의 사람을 바라봐주자. 그 사람은 지금도 당신을 기다리며 당신의 속도에 맞추어 함께 뛰어가고 있을 테니. 그리고 기억하자. 당신도 당신의 이름으로 살며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리라는 이유 그 자체로도 행복할 자격이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사랑받기 위해 태어닜으나 나를 버리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혹시 나의 존재가 드러나지 못 해 사라졌다고, 또는 혼자라고 생각해 외로운 밤을 지새우고 있다면 이렇게 말 해주고 싶다.
“제가 당신의 편이 되겠습니다. 그러니 하루만 더 살아주세요. 인생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를 우리 조금만 더 찾아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