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처럼 춤추는 것들은 언젠가 아스라질 것이 분명해서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나면 그 나무는 쓰러진 것일까…”
우리는 성숙을 표절한 웃음을 끼고 살아간다.
사실 많이 아프다. 그리고 아프다고 소리치기도 해봤다. 이 외침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외칠 때마다 외로움과 절망으로 돌아온 메아리는 나를 사로잡아 점점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으니, 이제는 침묵의 태도로 우울을 잠식한다. 그리고 이런저런 상처와 절망에 치여 일찍 철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겉만 보고 성숙해졌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가 절망 속에서 배운 것은 단 하나였다.
“절망 속에서 느끼는 불가항력을 인정하고 그저 망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것. 단 그 누구에게도 내면에 깊숙이 뿌리내린 좌절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 것.”
내가 나로서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고 있기에 성숙을 표절한 가면을 쓰고 강인한 사람처럼 묵묵히 살아간다. 성숙해야 사랑받을 것 같아서, 그래야 진짜 안 아픈 것 같아서, 나약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게 침묵으로 우울을 삼킨 우리는 보이기에 아프지 않은 것 같아 성숙한 사람이라 칭해진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면 속 실상은 여전히 아프고, 힘듦의 앞에서 나약하다. 여전히 울고 싶고, 아프다고 외치고 싶다. 다만 살려달라는 외침이 아무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게 될까 봐, 그저 처절한 외침에서 그칠까 봐 두려울 뿐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외침이 언젠간 어딘가에 닿으리라는 희망을 표상하는 열정과 용기를 잃어버린 것은 절망 속에서 불가항력을 느껴버린 때일 것이다. 절망 속 불가항력 가운데 살고자 애쓰는 당신에게 그냥 참 고생했다고 한 마디 건네고 싶다. 고군분투해온 시간은 겪어본 사람만 알기에, 세상에선 외면당했던 그 시간을 이 글을 빌려 인정해주고 위로하고 싶다. 단지 청춘을 여름과 같은 푸름으로 채우고자 했을 뿐인데 푸름이 짙어져 검정으로 가득하고 푸름은 아득해졌을 당신의 청춘에 검지만 아름답게 해줄 세 마디로 장식하고 싶다.
“괜찮다. 살아내느라 참 애썼다. 이미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