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10초 만에 울어보라고 할 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면?'
할아버지가 내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10초 아니 5초 만에 바로 눈물이 나왔다.
나에게 할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는다는 걸 알지만 그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 근데 현실이 됐다. 간암 말기 판정받은 지 2개월 만에 갑자기 할아버지가 떠났다.
첫 손주라는 이유로 친딸 같이 사랑 받았다. 어린이집에서 선생님한테 혼나 울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어디선가에서 나타났다. 엄마의 동의도 없이 바로 조퇴하고 에버랜드로 놀러 갔다. 내가 잘못해서 엄마에게 혼나도 할아버지는 되레 딸인 엄마를 혼냈다. 고등학생 때까지 따로 살아 외갓집에 놀러 가면 항상 엄마 몰래 용돈을 쥐어주셨다. 대학생이 된 후에는 객지 나가 고생한다며 용돈이 올랐다. 잘 먹고 다녀서 오히려 살찐 나였는데 할아버지에겐 짠해 보였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뒤처지기 싫어했다.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된 이후 할아버지도 스마트폰으로 핸드폰을 바꿨다. 카카오톡 사용법, MMS 보내는 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만들어드린 매뉴얼을 하나씩 복습하며 할아버지는 스마트폰 마스터가 됐다.
할아버지는 자칭 명의였다. 본인 건강에는 민감히 반응해서 농사일을 하다 머리가 핑 돈다며 병원에 가셨다. 뇌경색 전조증상. 초기도 아닌 전조증상을 바로 알아채는 분이었다. 월남전 참전용사라 보훈병원에서 의료비 90% 감면이었는데, 매월 정기검진을 다니셨다. 대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아침 7시 30분이면 알람처럼 문자를 보내셨다.
"할아버지 보훈병원 옴"
가끔씩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할아버지 셀카도 찍어 보낸다. 어쩔 땐 전화도 온다. 나에게 아침 7시 30분은 꿈나라에 빠질 시간이지만 할아버지에겐 해가 중천에 뜨고도 남는 시간이다. 그래서 몇 번 전화를 못 받았더니 나는 잠꾸러기가 됐다.
그런 할아버지가 간암 판정을 받았다. 말기인데도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굴을 먹고 탈 나신 이후 병원 검진을 받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자체 명의가 돼 "난 이미 암이다"라고 선언을 했다. 생일에도 "마지막 생일인데" 설날에도 "마지막 설인데"라고 말했다.
그 흔한 복수도 안 차는데 무슨 암이냐고 아니라고 했다. 근데 출근하다가 엄마한테 할아버지가 암이라고 그것도 말기라는 소리를 들었다.
수술이고 색전술이고 싹 다 안되는데 병원에서 신약이 나왔으니 치료를 해보자고 했단다. 그래도 방법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얼마 뒤, 교회를 갔는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다가 교회 분이 "말기면 가족 분들도 본인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죠"라는 식으로 말했는데, 진짜 싸울 뻔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데,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고 말을 저렇게 하지? 자기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네?'
3월 초, 할아버지는 혼자서 항암 치료를 받으러 갔다. 그 주 주말 할아버지를 보러 집에 갔다. 그냥 내가 알던 할아버지였다. 음식 냄새에 민감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알던 할아버지 그 모습이라 '역시 할아버지 항암도 그냥 이겨버리는구만' 싶었다.
엄마가 할아버지한테 전화도 자주 하라고 했지만, 퇴근 시간엔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시간이라 그러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항암 부작용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3월 14일 수요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회사에 있을 땐 절대 전화하지 않는 앤 데 물음표가 그려졌다.
"왜?"
"언니, 조퇴하고 와야 할 것 같아. 할아버지가 위독하시대. 병원에서 내일 아침에 가족들 모이라고 했나 봐."
갑자기 심장이 너무 뛰었다. 회사에서 울 순 없으니 보고를 하고 조퇴를 했다. 역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는데 눈물이 났다. 사람들 많은 정류장에서 참아보려고 했는데 그 수준을 넘어섰다. 버스 안에 앉아 미친 사람처럼 막 울었다.
엄마를 만났다. 일단 고비는 넘기셨다고 했다. (지금 보니 이미 상태가 워낙 나빠서 거기서 조금 벗어난 것일 뿐. 내가 생각하는 고비를 넘겼다와는 달랐다.) 다시 마음이 안정됐다. 나에게 고비를 넘겼다는 건 평소와 같아졌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시름 넘겼다 싶었다.
다음날, 병원에 갔다. 로비에서 보호자증을 받았는데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코로나 때문에 면회가 안 되는 상황에서 보호자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임종면회"가 쓰여있던 것이다.
'??? 뭐지.. 왜 임종면회..?'
어제는 안 좋으셨으니 아직 바뀌지 않았나 보다 하면서 위안을 삼으려고 했다. 병동에 올라갔다. 간호사에 할아버지 이름을 대니 "아, 000님 임종면회 오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때부터 다시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도 할 새도 없이 할아버지가 죽는다고?'
병실에 들어가 할아버지 모습을 보았는데 내가 알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다. 호탕했던 할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할머니가 흔들어 깨워야 간신히 눈만 뜨는 환자의 모습이었다. 내가 누군지 아냐는 말에 힘겹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모습에 무너졌다. 할아버지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비상구로 도망가 울었다. 의사를 만났는데, 항암 부작용으로 패혈증이 와서 주말이 고비라고 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보던 "길어도 두 달이십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할아버지는 1차 고비를 넘겼다. 집에 오고 싶다고 하셔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통화를 시켜줘서 영상통화를 했다. 영상으로 나를 마주한 할아버지는 울었다. 27년 인생 처음 보던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차마 할아버지 앞에서 울 수는 없어서 화면 밖에서 나도 울었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회복하는 듯 보였다. 4월 초엔 보조기를 짚으며 걸어 다녔다. 나에겐 이런 이야기도 했다.
"내가 지금 잘 안 먹는 건 오래 사려고 조절하는 거야."
할아버지 특유의 허세 섞인 말도 하는 걸 보니 위안이 됐다. 그리고 정치 이야기도 나보다도 잘했다.
그렇게 2주 뒤, 다시 갔을 땐 할아버지의 모습은 영 딴판이었다. 말을 하기도 귀찮아했고, 날 반기지도 않았다. 정치 이야기를 해도 관심도 없었고, 센 척하는 모습도 없었다. 그게 내가 본 할아버지가 의식 있는 마지막 모습이었다.
얼마 뒤, 할아버지는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그 사이에 한번 입원했었는데 엄마에게 의사가 그랬다. "아마.. 몇 주 뒤면 혼수상태가 올 수 있다. 그러면 또 입원하셔야 하는데, 그 뒤에는 아마 집에 가시기 힘드실 거다."
할아버지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의연해 보이고 싶었다. 할아버지를 닮은 것인지 약간의 허세였던 것 같다. 지인들이 할아버지에 대해 물어보면 태연한 듯이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속은 매일이 두려웠다.
사실 2달 내내 전화받는 게 불안했다. 매일 생존신고처럼 엄마랑 통화하는데, 그땐 엄마에게 전화 오는 게 싫었다. 가족 카톡방에 할아버지 상황이 전해지면 매일 혼자서 울었다. 인정하기 싫었는데, 할아버지와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5월 11일 토요일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위해 집에 가기로 했다. 원래는 오후 3시 기차였는데, 엄마가 바꾸라고 해서 10시 도착하는 기차표를 끊었다. 그날 새벽 할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 임종실로 옮겼다. 임종실에서 마주한 할아버지는 날 더 이상 알아보지도 인사를 건네지도 못했다. 그저 호흡기에 의지해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할아버지 앞에서 정말 울기 싫었는데, 그냥 울어버렸다. 할 말도 많았는데, 이 말을 하면 정말 끝이 올 것만 같아 내가 그저 할 수 있는 건 "할아버지.." 뿐이었다. 다들 당장 돌아가시진 않을 거라고 해서 아빠랑 밥을 먹고 동생을 데리러 집에 갔다. 1~2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할아버지를 보러 병원에 가고 있었다. 도착 10분 정도 남겼을 때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떠났다. 그렇게 내가 마주하기 싫었던 상황을 마주하게 됐다. 할아버지는 나랑 에버랜드에 다시 가고 싶어 했다. 당시 내일채움공제가 곧 만기라 할아버지랑 에버랜드에 숙박시설도 이용하고 추억을 다시 쌓기로 했다. 그러기로 했는데. 나는 할아버지랑 두 번 다시 에버랜드에 갈 수 없게 됐다. 눈도 못 감고 떠난 할아버지에게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사실 속에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입 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한복을 입히고 싶어 했다. 삼촌이 입혀드리고 다들 나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뉴스나 다큐에서 시신을 보여주면 징그러워했다. 유튜브에 염하는 영상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아니 왜 저런 영상을 올려"라며 뭐라 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할아버지 시신으로 향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이제 영안실로 가면 더 이상 할아버지를 만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삼촌이랑 할아버지에게 한복을 입혔다. 그리고 장의사가 와 할아버지는 떠났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장례가 시작됐다.
입관식을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내가 생각했던 입관의 모습은 스산할 것 같았다. 앞에 있는 건 시신이고, 주변 냉동고에도 시신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입관은 달랐다. 그냥 할아버지였다.
장례식 첫날 후회된 게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영안실로 가기 전, 다들 마지막 인사를 했는데 나는 끝까지 속에 있던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손님들이 오는 순간에도 다짐했다. 입관에서는 꼭 하기로. 입관식에선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너무 고마웠고, 너무 행복했어. 다음생이 있다면 그때도 꼭 할아버지 손녀딸로 태어날 거야"
다음날 발인을 했고, 호탕하고 당당했던 할아버지는 한 줌의 재가 되었다. 그렇게 나와 가족들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사실 금방 예전으로 돌아올 줄 알았다. 근데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분명, 할아버지의 임종과 입관 발인을 다 지켜봤음에도 할아버지의 부재가 인정이 안 됐다. 2달 동안 내내 불안해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해소될 줄 알았는데, 불안이 터졌다.
할아버지는 사진 찍히는 것을 좋아해 항상 날 사진작가로 사용해 본인 사진을 찍게 했다. 덕분에 내 핸드폰엔 할아버지의 사진과 영상이 많다. 갤러리에서 할아버지 폴더를 따로 만들었는데, 그 속에 담긴 영상과 사진이 400장이 넘었다. 매일 그걸 보며 울었다. TV를 봐도 재미가 없고, 그렇게 좋아하는 가수 영상을 봐도 웃음이 안 났다. 할아버지가 한 번이라도 꿈에 나오길 바랐는데, 한 번을 나오지 않는 게 서운했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내 생일 전날 꿈에 나왔다. 내가 알던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작별을 건넸다.
"할아버지가 없어도 씩씩하게 잘 살아야 해"
나는 꿈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 할아버지가 없으면 어떻게 사냐며 엉엉 울었다. 그 뒤로 종종 할아버지는 내 꿈에 나왔다.
가족들과 나는 종종 할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엄마는 영화를 보며 할아버지가 생각난다며 울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영화 광고를 보다가 또 울었다.
할아버지가 떠난 지 5개월이 넘었다. 나의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아직 할아버지와 어렸을 적 찍었던 사진이다. 이후에도 바꿀 생각은 없다. (한 가지 후회가 된다면 할아버지와 최근에 찍은 사진이 없다는 거다. ) 그동안 집에 가면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할아버지 집에 가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우리 집은 도보 5걸음 거리다.) 할아버지 작업장 쪽에도 가지 않았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5개월이 지난 지금, 작별을 고해 본다.
"정말 정말 고마웠어. 할아버지를 만나서 27년 정말 행복하게 살았어. 이렇게 금방 작별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많이 놀러 다닐걸. 뭐가 그렇게 바쁘다고 에버랜드도 못 갔을까 후회가 된다.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고기도 실컷 드시고, 좋은 곳도 실컷 놀러 다니셔. 나는 여기서 할아버지 창피하지 않게 열심히 살게. 다음 생에도 난 다시 할아버지 손녀딸 할 거야. 또 만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