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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록하는사람 개옹 Nov 27. 2024

추수

기록의 시작


  늘 혼자만 읽고 쓰던 것을 세상에 내놓기로 했다. 스스로를 바라보는 눈이 변했기 때문에 이제는 더 많이 쓰고 함께 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늘 기록에 대해 얘기하면서 나조차 꺼내어 놓지 못했다. 추수, 나의 변화를 처음으로 알렸던 글을 선두로 긴긴 기록을 시작한다.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면 여기가 서울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었다. 마천루를 지나 온전한 하늘을 보려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야 하기에 ···. 그러다 보면 디스크도 생기고, 담도 걸리고 그러는 거 아니겠나.



가을이 온다는 것은 올해 얼마나 수확할 것이 있는지 견주어 볼 때라는 것이다. 한 해 동안 열심히 길러 낸 것을 추수하는 풍경은 얼마나 지독하게 아름다운가. 끝도 없이 펼쳐진 들판의 황금빛 곡식들이 노을 진 가을 하늘에 비치는 풍경을 잊지 못한다. 그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가을의 창을 열고 찬 공기를 맡을 때면, 이 회색 도시가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오전 10시 즈음의 신선한 공기, 바람에 부대끼는 나뭇잎 소리, 낙엽, 어디선가 때맞춰 흘러오는 밥 짓는 냄새, 가끔 들리는 아이들 산책 소리 …  그런 것들이 너무 그리워서 혼자 슬퍼 지곤 하면, 당분간은 돌아갈 수 없다고, 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고. 그렇게 나를 다독이는 순간들이 늘어만 간다. 이 도시에는 너무 많은 사람과 사랑의 흔적들이 소진되고 채워진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냄새. 성인이 된 후 주말 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낯선 아저씨로부터 풍겨오는 그건 술 냄새였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나에게 굴욕적인 일들도 쉽사리 잊히지 않아서, 그런 걸 흑역사라 한다면 나는 평생 누운 자리에 이불을 덮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국가대표급 발차기를 하는 여자일 테지 ···.



   이제는 이 도시의 가을을 즐기기로 했다. 아픈 일들도 너무 많이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잘못한 일에 대해서도 나를 너무 탓하지 않기로 했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못한다. 그게 나일지언정 나쁜 것이 아니다. 그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런 내가 기특하고 대견한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걸까?’ 혼자서 중얼거리더라도 ‘아니야, 나는 그래도 돼.’ 말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내가 여기서 태어났더라면, 이런 지독한 매연 즘이야 당연하다 생각했겠지.’



그리 여기던 나는 이제 없다. 내가 나로 태어났기 때문에, 여기 잠시 머무르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내 삶에 너무 집착해서, 오직 나밖에 모르고 나만 바라보고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받았다. 언제나 혼자만 억울한 게 많은 사람을 보고 증오하여 몸이 야위고, 언제나 나를 일으키는 사람을 보고 애처로와 몸이 부푸는 그런 나날들을 보냈다.



  다시, 나로부터 다시

  나에게, 나를, 나로 인해, 내가, 나의, 나임에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이렇게 내가 좋으면서 내가 싫었던 나날들은 이제 없다. 나는 나를 좋아할 것이다. 노력하는 법조차 모르던 내가 많이 자랐다. 올해의 추수는 이걸로 되었다.



진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드디어, 드디어, 알게 된 것으로. 탈곡한다.




추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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