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책임의 경계에서
아마도 '재능회고 프로젝트'라는 제목을 보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왜 스스로의 재능을 회고하려 하는 걸까? 그것은 나를 응원하지 않았던 날들, 나를 믿지 못했던 순간들, 그리고 나를 사랑하지 않았던 과거에 대한 사과이자 화해다.
오랜 시간 스스로를 응원하지 않았다. 나의 노력을 가벼이 여겼고, 부족함만을 찾았다. 나를 믿지 않았다. 이 회고는 그런 시간들과의 작별이다. 지금부터, 나는 나의 어제로 돌아가 본다.
내가 글을 꽤 쓴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겨울 낙엽처럼 바람만 불어도 휘청일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도통 뭘 하고 싶은지 몰라서 표류하던 시기, 그림은 원래 곧 잘 그리는 편이었고, 그건 마치 타고난 재능의 영역으로 느껴졌다. 노력 없이도 얻어지는 일종의 요행 같았다.
나는 책을 읽는 일이 제일 좋았고, 누군가 글 쓰는 일을 시키면 드물게 기뻤다. 다른 일을 하는 건 너무 싫었는데, 그게 공부였고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마음은 항상 책이나 글 속으로 떠돌았다. 내게 공부는 할수록 멀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글 쓰는 일만큼은 내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아무리 상을 받고 칭찬을 들어도,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소유할 수 있는 재능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글은 마치 내가 운이 좋아서 우연하게 쓰인 것 같았고,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늘 나를 짓눌렀다.
내 것이 아닌 듯한 그 거리감이,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글과 함께하는 순간을 더 특별하게 느끼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성인이 된 후 우연히 들여다본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속에서 학년이 높아질수록 성적은 하락하고, 각종 문예대회의 1등은 늘 내 몫이었다는 서사를 발견했다.
아버지는 나를 그럴싸한 직업을 가진 여성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도저히 내 성적을 못 두고 보자, 이것저것 권유를 하시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정말 하고 싶은 게 없어 피하고만 싶었고, 도피처로 던진 말이 아뿔싸, '미대를 가겠다'는 것. 한 번도 그림 그리는 걸 배워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저 사춘기 여학생의 시선으로 모조리 거지같이 느껴지는 어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미술선생님이 좋았고, 애들이 아무도 없는 조용한 점심시간 미술실이 좋았던 건데. 꿈이 없다는 것 때문에, 오해받기 딱 좋은 상태였다.
‘그래 네 말이 옳타, 그럼 사범대를 가보자’
내 암울한 성적을 비관하던 아버지가, 나의 미대 선언을 45도 정도 회전해서 덥석 물었다. 고3 여름방학, 혼기가 지난 노처녀처럼 나를 받아주는 입시미술학원이 없어 시외에 있는 곳으로 어렵게 등록했다.
원장님은 바닥에 깔아 놓은 다 똑같은 그림들 중에서도 내 것이 간절함이 느껴져서 먹히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있으면 입안에 쓴맛이 났다.
꼬박 6년 동안 학원에 다니며 모든 것을 바친 타지 친구들의 나를 향한 시선은 곱지 못했다. 단 6개월 만에 목표한 대학에 합격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그들에게 비호감으로 보일 것이 뻔했다.
장녀로 태어나 아버지를 생애 단 한 번이라도 기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합격장만 아버지의 손에 쥐어준다면 비로소 자유가 되리라 믿었다. 삐뚫어진 책임감이라도 생기니 공부가 잘 되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일 눈물. 합격소식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기뻐서도 아니었고, 슬퍼서도 아니었다. 단시간에 이루어낸 쾌거로 가성비의 맛을 톡톡히 보았다. 이를 악 물고 나를 밀어붙이면 뭐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어린것이 참 독했다.
스무 살이 되어 처음 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물리적으로 자유는 얻었는데, 정신은 단단히 속박되어 있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그저 아버지를 위해 잘 나가는 사람이 되기 만을 바랐다.
어릴 적부터 나를 사로잡은 무기력은 내가 공부를 할 때도, 그림을 그릴 때도 나를 에워쌌다. 매일같이 아버지와 웃으며 통화하고, 미래를 바꿔놓는 희망적인 얘기를 늘어놓았으나 그런 기대를 감당하기에는 내 정신력이 너무 약했다.
선생은 되기 싫었다. 학교라는 사회가 인생의 전부가 된다니, 어른들처럼 고루해질 수 없다고 거만하게 생각했다. 동기들과 다르게, 임용고시라는 목표 밖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으려 했다.
좋아하는 글 쓰고, 남들에게 읽게 할 명분을 만들고 싶어서 학보사에 들어갔다. 대학 3년을 꼬박 바쳐서 편집장 자리까지 올랐다. 알바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던 중에도, 학보사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대의를 운운하며 밤낮으로 고군분투했다.
돈을 벌기 위한 단순한 노동보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과정이 훨씬 괜찮았다. 글로 세상을 기록하고, 학교 밖의 사회와 더 면밀히 연결되는 주제를 다루며 묘한 사명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단순히 장학금을 받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필요를 넘어, 내가 진짜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만족감이 그 시간을 채웠다.
하지만 모든 학생들이 나처럼 자치언론을 중요하게 여길 수는 없었다. 학보사의 예산을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끝없는 대화와 설득이 필요했다. 문제는, 그 대화가 술 없이는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술이 왕창 늘어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특히 집중했던 사회면 기사와 대외활동이 결국 문제가 되었다. 세월호 진상규명과 관련하여 목소리를 내던 사회대학 학생단체와 힘을 합쳐 교내 서명운동을 펼치자, 당시 학회장이던 A는 나를 겨냥해 후배들을 모두 소집했다. 사범대학 학생들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며, 세월호를 추모하는 단체에 서명하거나 동참했다면 즉각 취소하라는 어이없는 지시를 내렸다.
그들의 주장은 임용고시에서 정치적 활동이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당시 박근혜 정권의 탄핵 문제가 불거지기 직전의 시기였던 만큼, 사범대학이라는 공간에도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근거없는 몰상식한 논의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지금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 사건은 나를 분노하게 했고, 동시에 절망하게 했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 아래 진실을 외면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태도는 내게 큰 회의감을 안겨주었다. 다행히 나와 후배들 중 일부가 A의 주장에 반발했고, 그 반발 덕분에 사건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진실을 외면하려는 분위기와,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논리가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예비교사들에게 통용된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환장하게 만들었다. 그 사건은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고, 교육자로서의 삶에 대해 다시금 깊이 고민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기울어져가는 활자의 시대에, 학생자치언론이라는 이름으로 3년에 걸쳐 총 50편이 넘는 글들을 교정하고 투고했다. 일 년에 많으면 세 권, 적으면 두 권의 책을 묶어서 배포했다.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냈다. 어리지만 기민한 글을 쓰고자 노력했다. 비판도 비난도 달게 받았다.
읽게할 명분을 만들고 싶어서 시작한 일이 자유와 책임의 경계에서 많은 피로감과 좌절을 느끼게 했다. 과정에서 나는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은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통과 관습, 아날로그, 혐오, 분열, 투쟁, 침체 ...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채로 그런 단어들 사이에서 표류했다.
재능회고 프로젝트 <첫 번째>를 마치며,
오래전 기억들을 꺼내느라 피로했다.
글을 쓰게 된 것,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마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묘한 느낌을 준다. 글 속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지만, 특별히 이루어진 것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는 희미한 감각만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있는 당신을 다음 장의 새로운 페이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