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시 많은 전공과목 중에서도 조소파트에서 입체작품을 만지는 작업에 끌렸다. 남자 선배들과 함께 거칠고 힘을 쓰는 작업들이 유독 손에 잘 맞았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물성의 저항감과 낯선 불쾌함이 묘하게 좋았다.
학보사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는 와중에도 선배들과 좌대를 짜고, 용접을 배우고 있었다. 무기력함은 여전히 나와 늘 공존했지만 나름의 요령을 터득했던 것이다.
‘몸을 가만 두지 않아야 생각을 멈출 수 있다’
2017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주관하는 바다 미술제에 참가했다. 그해 여름은 플라스틱 냄새와 유리섬유들로 정말 위독했다. 난생처음 다루는 물성들 앞에서 자주 다치고 주저앉았다.
경화제와 티그 용접 때문에 늘 화상이었다. 발전기를 돌려 에어프레셔로 몸수색 펼쳐도, 발암물질인 유리 섬유는 온몸을 찔러댔다. 3m 1급 방진마스크는 또 얼마나 비싼지...
미처 준비를 못해 똑 떨어지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대학원 선배의 것을 몰래 쓰다 뒤지게 혼났다. 하루에 버려지는 니트릴 장갑이 몇십 장씩 되었다.
학교 기숙사 헌 옷 수거함에서 옷을 주워 입었다. 남이 입다 버린 옷은 하루아침에 보기 힘들 정도로 걸레짝이 되었다. 그 옷을 다음날도 입고, 그다음 날도 입고, 또 그다음 날도 입은 후 버렸다. 그리고 다시 주워 입었다.
‘도대체 왜 이걸 한다고 해가지고’
예술관 야외조각장은 땀과 원망으로 가득 찼다. 그때 처음 선배들에게 담배를 배웠다.
'담배 한 대 피우고 합시다'
탈출구를 제안하는 달콤한 한마디. 2분, 그 짧은 시간에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몇 주간 제대로 쉬지도 못한 나는 그게 무슨 느낌인지 늘 궁금했다.
불이 꺼진 야외조각장 앞, 간이 조명 아래에서 나는 선배가 건넨 에쎄 체인지 1미리를 손에 쥐었다. 모든 무게를 잠시 내려놓게 해주는 대단한 무언가처럼 느껴졌지만, 동시에 내가 책임감에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다미술제가 열리는 다대포해수욕장의 노을은 모든 것을 잊게 만들었다. 모래사장 위에 크레인을 데리고 다니며, 비계를 설치하고, 희미한 전기를 끌어다 겨우 용접을 하고 있었지만, 저녁이 되면 붉게 물든 하늘과 수평선이 그 원망을 덮어주었다. 다대포의 모래사장 위에서 내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단련되고 있음을 느꼈다.
‘35°사람들’ 은 다양한 형태로 공존하는 인간의 개별적 공간과, 특성들을 혼합매체로 표현한 것이다. 무기력에 빠진, 멍청한, 허황된 것을 좇는, 양면적인, 외면하는, 노동하는. 각자가 바라보는 인간의 형태는 모두 달랐다. 작업을 하면서 남긴 단체사진은 딱 한장 뿐이었다.
다대포에서 몇 가지를 깨달았다. 우선, 나는 힘이 세고 겁이 없으며 손이 빠르다는 것. 동시에, 내 재능은 애매하다는 것도.
한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뛰어나기보다는, 다양한 일을 고르게 해낼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스스로를 미워했다. 예술가로서의 자질은 미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연애를 하고, 학보사와 조소 작업을 병행하는 내 모습을 보며 하나 더 깨달은 것은
'나는 정말 체력이 좋구나'
마침내 2018 비엔날레 국내 학생작가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갔다. 곱게 프린팅 된 신년 연하장을 우편으로 받았다.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았다. 그 순간, 지독하면서도 아름다웠던 시간의 끝이 보였다. 땀과 원망, 그리고 노을로 가득했던 여름은 내 안에 큰 자국과 함께, 기흡연자 라는 타이틀을 남기며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대형벽화 작업도 많이 했다. 15명 정도의 팀을 끌고, 온몸에 페인트칠을 해가며 소외지역 초등학교에서 벽화 봉사를 했다.
나는 졸업요건으로 필요한 사회봉사시간을 채워주는 선배로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점점 입소문을 타고, 여기저기서 벽화 작업 요청과 디자인 외주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일을 따오고, 선/후배 가리지 않고 수주를 주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내가 사업수완이 꽤 있구나' 어리석은 착각이 찾아왔다. 나름 현실이기도 했다.
나는 용돈벌이를 시켜주는 선배로 자리 잡았고, 후배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따내고 돈을 벌었다. 단순히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수익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책임감을 느꼈다.
내 체력을 믿고, 계속해서 창작하는 일에 나를 소진시켰다.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에 내 창작물을 외부로 노출시켰다. 글도 그림도 언제나 대중에게는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나를 주체로 삼은 창작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갈구하고, 불특정다수에게 인정받고자 애쓰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살인적인 행위인지 깨달았다.
예술가는 자신이 고통스럽고 공포스럽게 느끼는 것을 피하지 않고 파고드는 성향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의 나는 너무 많이 파고들어서, 수업시간에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작품을 통해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에 쉽게 지쳐 나가떨어졌다. 내 작업물이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이 고통이었다. 결국 그리는 것과 쓰는 것 모두를 멈추었다.
마주하며 참아왔던 책임감들로 인해 자신을 상실했다. 스스로 부여한 책임감이 어느 순간 나를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만 했지만, 실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릴 줄이야.
나를 채우고 이끌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면서, 나는 텅 빈 상태로 남겨졌다.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완전하지 못한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삶이,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얼레벌레 휴학을 하고 공부 외의 온갖 잡도리를 병행하면서 1년을 버텼다. 에이전시에서 떨어지는 외주를 맡기도 하고, 방송사 편성 자막을 제작하기도 했다. 대학입시학원 교재 디자이너를 하다가, 신발 편집숍 직원으로도 일했다.
돈 벌어먹고 사는 게 그리 쉽지 만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어렴풋 '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말이 어떤 건지도 깨달았다.
최진영의 소설에서는 상실은 차라리 축복이라고 했다. 불구가 되더라도 불구로서, 다른 존재로서 살아갈 여지가 생긴다고. 그런 축복이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 이렇게 버틴 1년이, 이상하게도 나에게 꽤 많은 것들을 남겼다.
무엇보다, 나를 돌봐주던 사람들.
우정에도 늘 무기력하던 내가 자의로 친구를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 해는 버티는 것 자체가 목표였지만, 나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 덕분에 조금 더 건강해진 채로, 졸업을 했다.
또 무기력이 찾아와 나를 삼키기 전에, 쉴 틈도 없이 뭘 할 수 있는지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습성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데, 나에게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상당히 가학적이기 때문이다.
일단 닥치는 대로 디자인을 열심히 해보자 다짐했다. 그 노력은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둘러싼 잘못된 책임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또 다른 책임을 떠안으며, 그래야만 내 존재가 증명된다고 믿었다. 이런 부담이 없이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되기 힘들 것 같다는 어리석은 확신 속에서 허덕였다.
재능회고는 여기까지, 재능으로 생각되는 나의 어제를 기록해 보았다.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별 거 없는 자조적인 이야기라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책임과 자유의 경계와 창작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던 그 시절의 나를 조용히 되돌아보고 싶다.
이후의 이야기는 다음 편에 풀어내기로 한다. 무작정 떠난 제주에서 만난 나 자신과 그곳에서 깨달은 것들, 그 또한 꽤나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있는 당신을 다음 장의 새로운 페이지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