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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존재의 가치 Sep 29. 2024

1부. ‘나’는 누구였을까

2장. 등 떠밀려 사회로 나가다, 교직의 시작 (1)

 재수를 거쳐 겨우 입학한 대학은 희로애락이 가득한 곳이었다. 처음엔 내가 생각한 대학 생활이 아니었기에 소위 말하는 ‘5월 병’이 누구보다 빠르게 3월 말에 오기도 했지만, 이내 잘 적응해서 과대표, 과 학생회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3, 4학년을 보내며 앞으로의 진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매일 친구와 나누던 이야기는 항상 똑같았다.


“우린 아직 울타리가 필요한데 등 떠밀려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느낌이야.”


 앞에는 낭떠러지가 기다리고만 있을 것 같았고, 무언가 준비는 해야 할 것 같은데 남들처럼 휴학하며 고민하기엔 재수 1년 때문에 이미 뒤처진 것 같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1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데 그때는 왜 그리 그 1년이 조급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무조건 교사가 되고자 한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사범대에 입학하게 된 것부터가 내 통제 밖의 일이었다. 고3 수능에서 원하는 만큼 결과를 얻어내지 못한 나는 결국 라군으로 ‘강대’(강남대성이 이땐 최고였다.)를 선택하였고, 여름이 다가오자 담임 선생님은 60명을 차례로 상담하기 시작했다. 누구의 눈에 띄지도 않는 그냥 60명 중 한 명이었던 나는 중학생 때부터 희망했던 경영·경제학과로 진학하길 희망했고, 담임 선생님은 SKY 라인에서는 문과 학과 중 가장 커트라인이 높은 상경계열로만 쓰지 말고 한 학교 정도는 과를 낮춰 쓰기를 권하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영어교육과 쓸래, 국어교육과 쓸래?”하셨고 엉겁결에 그나마 좋아했던 국어를 택했다. 그렇게 어이없게 정해졌다. 내가 입학할 학과가.


 6장의 수시 카드 중 합격한 것은 단 하나, 그게 바로 국어교육과였다. 삼수를 하거나 반수를 할 체력과 마음의 여유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국어교육을 4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도 교사가 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교원자격증이 하나 생기니 국어국문학과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을 뿐이다. 혹시 모르니 임용시험 준비를 친구들과 하면서도 4학년 땐 대학 체육관에서 진행된 취업 박람회에 가기도 했다. 유명 대기업에 문의를 하러 용기를 내어 들어가니, 안타깝게도 사범대생은 선호하지 않는단다. 자격증 믿고 언제든지 회사를 떠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임용시험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줄 아나!’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결국 더 둘러보기를 주저했다. 취업하려면 스펙이 필요하다기에 인턴에 지원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AI가 널리 퍼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자연어 처리 과정에서 국어 전공자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인터넷 어디선가에서 본 터였다. 그러나 당연히 결과는 낙방!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기대했었더랬다.

 이것저것 탈출을 시도해 보았지만 모두 여의찮았고, 결국 내게 남은 것은 단 하나, 교사였다. 마침 교생 실습을 모교로 다녀온 터라 교사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높았기도 했다. (교생 실습은 실제 교사 일의 0.000000001%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내게 남은 건 교원자격증뿐이요, 이제는 정말 임용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공부에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었던 나였지만, 임용시험의 벽은 높았다. 모범답안조차 공개되지 않는 이 시험에서 어디서 감점되었는지, 어느 부분이 부족한지 알 수 없는 점이 너무 날 지치게 했다. 친구들, 후배들이 합격할 때 나는 합격하지 못한다는 점이 매우 자존심 상하기도 했다.

 앞에서도 나왔듯이 난 ‘완벽’한 삶을 추구했으니까. 언제 합격할지 모르는데 계속 나는 독서실에 처박혀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이 날 너무 힘들게 했다. 이미 재수 시절도 ‘잃어버린 스물’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대문자 ‘E’인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독서실에만 있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나 사립 채용 시험 과정 중 받은 질문이 날 부추겼다.


“근데 경력이 없네요? 아, 어려서?”


 나름 SKY로 불리는 학교의 교직이수도 아니고 사범대학을 졸업하였고, 최우수까진 아니어도 우수 졸업생이었던 나는 막연히 기간제 교사 자린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무경력이라는 이유로 20개 넘게 쓴 원서들 모두 다 서류에서 탈락되는 것이 아닌가! 너무 충격이었다. 그래도 SKY 사범대인데? 도대체 경력 없다고 안 뽑아주면 그 무경력인 사람은 어디에서 경력을 쌓는단 말인가!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바로 대학교 2학년 때 카페 아르바이트를 했던 기억. ‘카페 알바’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무작정 카페 아르바이트에 지원서를 여러 개 썼는데 죄다 경력자를 우대하는 공고였기에 번번이 서류 탈락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 한 군데 합격해서 6개월 동안 힘들었지만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발 한 군데만 붙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내 출신 학교를 좋게 봐주셔서 한 군데 합격해서 1년 동안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26살에 첫 교직 생활의 시작, 2학년 9반 담임이자 독서와 문학 교과 담당 교사. 설렘 가득한 상태로 시작했지만, 실상은 녹록지 않았다.

 3월 첫 주에 들은 하나의 사실은 내가 기존 선생님이 있을 수 있는 자리에 그 선생님을 밀어내고 들어온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 셈이다.


 문제는 그 선생님과 한 학기 동안 팀티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게 이 사실을 말해준 사람은 내가 혹시나 말 실수를 할까봐 날 위해서 해준 말이었겠지만, 그 사실은 나를 굉장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아, 이게 바로 사회라는 거구나.’


 사회가 뭔지도 모르면서 “우린 아직 울타리가 필요한데 등 떠밀려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느낌이야.”라고 말하곤 했던 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만큼 사회는 혹독한 곳이었다.


 3월 첫 주부터 내 개인 신상을 학생들에게 말하고 다니던 동료 교사, 남학생들과 같이 서 있기만 해도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 화장실에 갔는데 “왜 노트북을 학생들이 들게 시켜?”라며 내가 들게 시킨 것도 아닌데 욕하는 동료 교사들, 기숙사 내 학생들 간 기 싸움으로 인한 매일 상담.

 물론 행복한 시간들도 정말 너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첫 사회생활은 눈물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백 개의 눈이 날 매섭게 항상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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