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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내 인생의 새 챕터, 결혼

[김루하 작가]

by 은나무


남편과 나.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둘 다 열아홉

수능을 마친 겨울이었다.

친구의 친구였던 그는 조용하고, 어딘가 어두웠다.



그런데 그게 참 멋져 보였다.

그땐 그런 남자가 '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지금 보면 그냥 말이 사람이었던 거다.)



그와 사귀고 나서 그는 군대에 갔다.

나는 그 힘든 고무신이 되었다.
우린 부대에서도 유명한 커플이었다.

편지가 며칠 안 오면 "그 고무신 여자 친구랑 싸웠냐? 휴가 줘라." 진짜로 휴가를 나왔던 사람이다.



나는 매일 편지를 썼다.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 근데 너 없어서 싫었어'

그는 내가 보낸 편지를 전부 다 모아뒀다.



가끔 싸우면 내가 울며 전화를 걸었다.
"나 편지 그만 쓸 거야." "그래."
"아니, 진짜 그렇게 알았다고 하면 내가 섭섭하잖아."
그땐 그게 사랑이었다.



붙잡아주길 바라면서 먼저 밀어내는 사랑.

이제 생각해 보면 참 귀여운 시절이다.

(물론 그땐 전혀 안 귀여웠다.)



그렇게 연애가 5년, 10년, 16년이 됐다.

길다. 웬만한 드라마보다 방영 기간이 길다.

연애라는 단어보다 '생활'이 더 어울리는 관계였다.



나는 낮엔 직장인, 밤엔 학생이었고,

그는 늘 "조금만 더 있다가 자리 잡을게."라고 했다.

그리고 나도, 늘 조금 더 기다렸다.



어느덧 나는 박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있었다.

남들은 "이제 거의 다 왔네!"라며 축하했지만 내 마음은 이상하게 비어 있었다.



이제 누가 나를 평가해 주지도, 지도해주지도 않았다.

학교도, 일에서도,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나는 '잘 버틴 사람'이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



그때 결혼이 보였다.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 인생의 다음 챕터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때 먼저 말했다.



"우리 결혼하자. 나 수료 전엔 해야 할 것 같아."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말했다.


"그래."
(이 남자, 프러포즈도, 이벤트도, 대사도 없다.)



결혼식 준비는 정신없이 지나갔다.

결혼식을 하기 위한 코스대로 예식장 예약, 가족 인사, 청첩장 주문까지... 모두 "해야 하니까 한 것"들이었다.



드라마처럼

'우리 이제 한 가족이야!' 하는 설레는 감정은 사치였다.
그리고 현실은,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시댁은 친정과 너무 달랐다.

밥상 위 반찬 가짓수, 대화의 높낮이, 심지어 웃는 타이밍까지 달랐다.



나는 나름 아등바등 노력했다.

내가 가진 모습 그대로 또는 더 보태서, 어떻게든 시댁에 맞춰보고 가족이 되고 싶었다.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고, 좋은 아내로 보이고 싶었다.

(좋은 며느리, 좋은 아내는 어떤 걸까..?)



그런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더 외로워졌다.
내 노력과는 반대로 중간입장인 남편은 조용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거나, 반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특별히 나를 도와주지도 않았다.



그의 평온함이 어느 순간엔 '방임'처럼 느껴졌고,

또 때로는 '무관심' 같았다.

나는 애가 탔고, 그는 그저 고요했다.



그래도 이상하게, 그 고요가 우리 관계를 끝내

무너지지 않게 했다.

그의 조용함 덕분에 내 불안이 조금씩 식었다.

물론 싸움은 여전했다.



"나 사랑해?"

"응."

"응 말고 좀 길게 말해봐."

".. 사랑하지."

"그건 사과할 때 하는 말이잖아."


투닥투닥, 그렇게 하루가 갔다. 결혼은 안정이 아니었다. 그저 두 사람이 서로의 속도로 버텨내는 일이었다.

우린 여전히 다르다.



나는 불안할수록 뭔가 자꾸 부산하게 움직이며 뭐라도 하려 하고, 그는 불안할수록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하루의 끝에
"치킨 시킬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는 게

그게 꽤 든든했던 것 같다.



30대의 결혼은 늦은 선택이 아니라
그냥 내 인생의 다음 챕터로 지나가는 문장이었다.

가끔은 문법이 틀리고, 쉼표가 엉뚱한 데 찍히지만 그래도 계속 써 내려가고 있다.



지금 쓰고 있는 새 챕터의 새 문장처럼....



[작가소개]


https://brunch.co.kr/@ruhaspace


우리 루하 작가님은 상담사, 강사, 임상심리사, 루하공간 대표로 활동 중 이세요. 유아부터 노년까지 전 연령층을 상담합니다. 우울, 학습, 부모코칭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전문가이십니다. 워킹맘으로 상담을 실전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똑 부러진 여성입니다.


활동이 많아 글을 쓸 여유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늘 함께 쓰고 싶어 하시는 마음과 열정이 멋진 작가님...


저도 루하작가님의 남편과 연애시절 이야기를 읽으며

고무신 시절이 생각났어요. 저는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곰신을 거꾸로 신었죠. 하하하하^^;;;


그래서 루하작가님의 오랜 기다림과 가족이 되기 위해 애씀과 오랜 시간 연애를 했어도 결혼 후 또 다른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이야기가 저에겐 새로운 이야기였어요.


저처럼 루하 작가님의 글을 보며 옛 추억과 오랜 장기연애

스토리들이 있는 독자분들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추억과 각자의 가정을 생각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루하작가님 응원 많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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