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굉장한 이익을 얻었다. 그 수익금으로 국민체육진흥공단을 만들어 체육 발전에 보탬이 되는 인재 개발을 위해 투자를 했다. 그 인재 개발 계획 중 하나로 스포츠 전문과 과정이 있었다. 전문과 과정에서 20여 명을 뽑는데, 그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다. 이 전문과 과정이 끝나고 세계 철인 3종 경기 본부인 캐나다 밴쿠버에서 6개월 동안 인턴을 하는 기회가 있어서 해당 포지션에 원서를 접수했는데 3명 중 내가 뽑혔다.
나는 철인 3종을 계기로 인맥 구축의 기회로 삼아 스포츠 외교계에 발을 들여놓고 싶었다. 비록 인턴 자리였지만 스포츠 마케팅 전문가에 경기인 출신으로 여러 가지 경험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는 친화력이 뛰어나서 일단 나를 실전에만 배치하면 어디든지 헤엄쳐 다니며 대어를 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경비를 대한체육회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어서 세계본부에서는 공짜로 인턴을 채용할 수 있었기에 이러한 조건을 승낙한 상태였다. 대한체육회는 나를 선발하였고, 나의 이력서를 보내며 입국 날짜를 잡아달라고 세계 본부에 통보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답이 오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나는 사는 집과 하는 일 모두를 정리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너무 경력이 많아서 나를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 황당했다. 우리나라에서 일꾼 하나를 공짜로 보내준다는데 내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경력이 너무 많다고 변명한 것 같다. 내가 이력서를 보낼 때 나의 모든 이력을 써서 보냈는데, 경력이 너무 많아서 나를 거절한 것이 분명했다.
대한체육회에서도 입장이 난처해서 곤란해했다. 실제로 3명의 후보 중에는 나보다 더 젊고 유능한 인재들도 있었지만, 철인 경기 선수 출신인 내가 그 자리에 적임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뽑은 것인데 캐나다 세계연맹에서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것이다. 나이를 많이 따지는 우리나라에서도 나를 뽑아주었는데 세계스포츠연맹에서 나를 거부한 것이다. 40대에 인턴을 하겠다는 것도 쉽지 않지만, 나이가 많다고 거절을 한 것이 더 수긍하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해 보니 차츰 수긍이 되기 시작했다. 내가 경력이 너무 화려해도 상대방에게는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는 61여 개 대학에서 거절당했는데, 또다시 거의 다 된 인턴마저 이렇게 되다니! 세상에 나보다 거절 많이 당한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나이를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40세에 인턴을 지원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특히 도전하는 데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의 방향은 항상 바뀌고 있다. 우리는 늘 배우고 도전하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새로운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위해 도전하는 것이다. 나는 스포츠외교에 관심이 있었기에 논문도 “스포츠외교관의 진출 유형”이란 나의 인생 목표와 연관되는 연구를 하면서 나의 미래를 꿈꿔 왔다. 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공한 스포츠외교관들은 스포츠 계의 인턴을 통해서 발판을 만든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나도 새로운 분야의 경험이 없는 터라 인턴을 통해서만 새로운 분야에 입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논문에서 얻은 지식으로 나는 제2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려 했다. 인턴을 통해 스포츠외교가의 꿈을 가꾸어 가려고 했는데, 나이 때문에 우회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지원한 세계연맹본부는 밴쿠버 서부의 부촌에 위치해 있다. 낙방 후 4-5년이 지난 후 나는 동부의 빈민촌에서 마약중독자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시작했고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