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다. 퇴근시간은 6시.
유치원 차량기사 팀과 윗반 선생님 엘린은 하원 차량활동을 하러 나갔다. 6시 전에는 온다고 유치원을 잘 부탁한다고 나간 게 5시쯤이었다. 시계를 보니 5시 45분. 꼬마들은 다 집에 가고 나와 4살 데이비드만 남았다.
"데이비드 오늘은 엄마가 늦네. 아 맞다. 오늘은 아빠가 데리러 오신다고 했지?"
눈이 마주친 데이비드가 레고 놀이를 하다 씩 웃는다. 그때였다. 유치원 문에 달린 종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흔들린 건,
"하이."
주황색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하나가 유치원 문을 열고 들어온다. "데이비드."
데이비드가 쪼르르 달려간다. "우리 아빠예요."
"아 그렇구나. 저기 죄송한데 아이디를 보여주시겠어요?" 난 남자옆에 서서 함박웃음을 지며 말했다. 그때였다. 술 냄새가 확 풍긴 건.
아 술 드시고 오시면 안 되는데. 속으로 중얼거린다.
"잠깐만요. 제가 주방 정리를 하다 나와서요 오븐을 켜놓고 온 것 같아요. 잠시만요. 금방 올게요."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숨는다. 유치원 원장에게 전화를 건다. 영어 전화는 늘 가슴 떨리는 일이다. 굴러다니는 펜을 들고 할 말을 미리 적어둔다. 신호가 한 번 두 번 세 번 "헬로" 원장 목소리가 새삼 반갑다.
"음. 하이. 디스이즈 유영. 데이비드 아빠가 애를 픽업하러 왔는데 그분한테 술 냄새가 많이 나요. 어떡하죠?"
"그래, 잠깐만요. 내가 데이비드 엄마한테 연락해 볼게요. 데이비드 아빠가 데이비드를 데리고 가면 안 돼요. 알죠?"
"네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후다닥 데이비드와 데이비드 아빠에게로 돌아간다. 시간을 끌어야 돼. 음 뭐라고 시간을 끌지?
"안녕하세요. 데이비드 아버지 제 이름은 유영이예요. 라스트 네임은 리 LEE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음. 하이 제 이름은 폴이에요. 폴."
"혹시 스펠링이 어떻게 되실까요?"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는다. 시계를 보니 5시 55분 그래 5분만 더 버티면 차량활동을 마친 직장동료들이 돌아온다. 그때까지 더 버티자.
"제가 한국에서 와서요. 혹시 세인트 존스에서 피시 앤 칩스 제일 잘하는 곳이 있을까요?" 사실 궁금하지 않다. 그래도 피시 앤 칩스가 정말 궁금해서 3일 밤을 꼬박 새운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데이비드 아빠에게 묻는다.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데이비드 아빤 종이에 주소를 적어준다. "여기가 젤 맛있죠. 우리 데이비드도 좋아하고."
"아빠 빨리 가자. 집에 가." 눈치 없는 꼬마 데이비드가 아빠 팔을 잡아 끈다.
안돼 데이비드 지금 가면 안 된다. 어떻게 구한 직장인데 잘리면 안 된단 말이다. 마음의 소리가 삐져나온다.
"데이비드, 우리 아까 색칠한 핼러윈 그림 아빠한테 보여주자." 4살짜리 데이비드에게 애원을 한다. 구구절절하게 데이비드에게 매달린다.
그때다.
유치원 문이 다시 열렸다.
"오마이 가쉬. 허니"
데이비드 엄마다. 오. 신이시여 고맙습니다. "오 하이. 하와유"
"아임 굿."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이제 괜찮을 수 있다. 아이고 10년 감수했네. 그래도 오늘도 또 하나 배웠잖아. 인생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지만 당황하지 않고 하나씩, 천천히 풀면 돼. 모르면 도와달라고 하고. 앞으로도 그런 일이 생겨도 그렇게 하면 돼. 덕분에 오늘도 또 배웠네.
아휴. 가슴 콩닥거리는 그날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