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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생 Nov 19. 2024

[제12화] 고집스런 생일, 할 만한 행복

24. 11. 13. (수)

내 생일은 음력이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다들 양력으로 생일을 기념하는데 내가 특이한 편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음력으로 챙겨 주시던 게 여태 굳어졌다. 음력 생일을 쇠노라면 주변에서 잘 기억을 못 한다. 매년 바뀔뿐더러 요새 음력 날짜를 얼마나 관심 있게 보겠는가. 게다가 하필 그 날짜가 수능과 임용 시험 전후인지라 고3 때에도, 임용 시험 수험생 때에도 생일을 크게 신경 쓰지 못했다. 그 때문인지 나는 내 생일에 그닥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며 매년 오는 의례적인 일처럼 여겨 왔다.


이런 내 생각과는 달리 부모님은 생일을 중요한 기념일로 생각하신다. 매년 가족들의 생일날 새벽부터 꼭 흰쌀밥과 미역국 그리고 과일과 케이크를 갖춘 상을 차리고 고깔모자를 쓴 채 축하 노래를 부르는 일은 어느 순간부터 우리 가족에게는 엄숙하면서도 중요한 의식이 되어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시작된 이 세리머니는 부모님에게는 자랑거리이자 장차 이어 나가야 할 유산이 되어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는 숭고한 행사로 자리 잡았다. 나아가 생일에서 출발한 가족 행사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 신정, 명절 등의 기념일들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사실 결혼 전까지는 그게 그닥 반갑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가족 생일엔 꼭 선물을 챙겨야 했는데 학생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늘 민망한 마음이었다. 액수가 아닌 마음이 중요하다 하더라도 가볍디 가벼운 주머니에서 성의 없어 보이지 않는 선물을 떠올려 준비하기란 꽤나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더욱이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크리스마스이브날이었기에 사춘기 이후로는 정말 답답했다. 친구들과 놀기에도 빠듯한 시간인데 이브 저녁이면 집에 들어와서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해야 했으니까. 전 여친이자 현 아내와 연애를 할 시기에도 이런 전통이 이어졌다. 애인을 버젓이 두고 ‘휴일은 가족과 함께’를 중얼거리는 신세를 면치 못하니. 퍽 애처롭지 않은가. 그렇다고 부모님의 고집에 예외가 생기지는 않았다.


결혼한 이후로 예전처럼 가족 행사를 챙기지는 않는다. 부모님 생신에는 찾아뵙더라도 내 생일은 그냥 아내와 챙기기로 하였다. 아침부터 축하 메시지로 카톡창이 바쁘다. 몇 해 전부터 카카오톡에서 음력 생일도 알려주기 시작했는데 대개 그걸 보고 연락을 한다. 예전엔 친구들 생일을 꼬박꼬박 챙겼다. 어느 순간부터 선물이 오가는 관계가 정해져서 생일마다 주고받는 지인들이 있다. 의례적이라는 생각이 든 적도 있지만 그래도 서로를 생각하며 선물을 고르는 수고를 들이다 보면 조금이나마 애틋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그 마음이 담긴 선물을 받을 때에도 그렇고. 부모님도 그래서 꼭 선물을 챙기게 하셨지. 육아의 고단함을 생각하며 보내준 비타민이 한가득이다. 종아리 마사지 기계는 복직하면 유용하게 쓰겠다. 아내가 아침 겸 점심으로 미역국을 올린 한 상을 걸게 차려 주었다. 요새 늘 내가 요리를 했는데 남이 차린 음식이 역시 맛있다.


선물 받은 교환권으로 빵과 케이크를 고르고 옛날 통닭을 포장했다. 케이크를 놓고 노래를 부르는 전통은 이제 우리 집으로 이어졌다. 작년 생일부터 첫째가 함께 박수를 치며 축하 노래를 부른다. 제 생일인 양 촛불을 끄려고 내내 후후 분다. 눈만 끔뻑이는 둘째는 기저귀가 터질 듯 차오른 줄도 모르고 촛불과 내 얼굴을 번갈아 두리번거린다. 아내와 두 딸에게 축하를 받노라니 푹신한 이불에 엎어진 것처럼 행복이 간질거린다. 이 맛에 부모님이 고집을 부리셨나. 나도 고집쟁이가 될 것 같은 예감이다.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이라 하였는데 세 여인에게 둘러떠올리는 말이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는다. 결혼과 육아에서 비롯된 부담과 고단함이 만족과 기쁨보다 더 크게 울려 퍼지는 세태 속에서 누가 내게 묻는 다면 ‘오늘은’ 이렇게 말하겠다. 결혼도 육아도 할 만하다고.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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