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풍역 출입구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쓰고 있는 마스크를 다시 한 번 여민다. 지하철 폭행 사건을 겪은 뒤 새로 생긴 습관이다.
삼성역으로 가기 위해선 대림역에서 내려 2호선으로 환승해야 한다. 2호선으로 안내하는 표시를 따라 환승 통로를 걷다 보면 신도림역 방향으로 가는 내선순환 열차와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가는 외선순환 열차의 도착 현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안내판이 있다.
평소 나는 이 안내판을 일부러 보지 않는다. 내가 타려는 열차가 지금 역으로 진입하고 있는 게 보이면 뛰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이 안내판에 눈길이 간다. 정확히 말하자면 열차 도착 현황 안내 화면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영상 광고판이다.
그 영상 광고판에는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라는 문구만 달랑 떠 있다. 그걸 보니 예전에 화제가 되었던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가 생각난다. 전봇대와 가로수 등 거리 곳곳에 일제히 붙어 있던 그 문구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어느 돈 많은 남자의 사랑 고백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한 여성 포털사이트의 티저 광고인 게 밝혀지면서 잠시나마 현대 사회의 순애보를 기대했던 사람들을 김빠지게 했다. 이제는 식상해진 그 광고 기법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기업이 있다고 생각하며 나는 2호선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그때 에스컬레이터에서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광고판의 화면이 갑자기 바뀌면서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라는 문구가 또 뜬다. 승강장으로 내려서니 스크린도어에 붙어 있는 영상 광고판에도 똑같은 문구가 보인다. 이 정도 광고를 하려면 꽤 규모가 있는 기업이리라.
갑자기 과연 무슨 제품을 파는 기업이기에 이런 문구를 사용할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이미 많이 사용되어 식상하다고 여겨지는 광고 기법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승강장의 탑승 위치에 도착하자마자 열차가 전철역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실로폰 소리가 들린다. 스크린도어가 열린 후 전동차에 탑승하니 비어 있는 좌석이 없다. 나는 열차 출입구 바로 옆 좌석의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는다.
그때 열차 출입구 상단에 부착된 동영상 광고판의 화면이 바뀌면서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라는 광고가 송출된다. 그러고 보니 이제 열차 내부에까지 동영상 광고가 파고들었다. 승객이 앉은 좌석 쪽의 벽면에 부착된 인쇄물 광고들은 예전과 달리 빈곳이 많이 눈에 띈다.
광고도 이제 디지털이 대세다.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의 광고주 역시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지 인쇄물 광고는 전혀 하지 않았다. ‘선영아, 사랑해’ 때만 해도 집에 있는 프린터의 A4 용지로 막 출력한 듯한 그 소박한 형식이 사람들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았는데 말이다.
삼성역에서 내려 케이사이지니로 나가는 출입구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도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의 광고가 곳곳마다 송출된다. 센서가 있어서 내가 다가가면 광고가 송출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대단하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송출되고 있는 그 광고판을 따라 출입구로 나가니 케이사이지니가 바로 앞에 보인다.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2시 48분이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케이사이지니로 향한다. 두 개의 면을 곡선형으로 연결한 농구장 네 배 크기의 광고판에서는 거대한 파도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몰아치고 있다.
나는 그 밑에 서서 주위를 찬찬히 살펴본다. 내 눈은 어느새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소울이만한 덩치의 남학생을 찾고 있다. 아니다. 내가 기다리는 이는 소울이가 아니다. 맞춤법 검사기를 통해 내게 메시지를 보낸 이는 누굴까. 혹시 보라매날다를 해킹한 녀석일까.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나는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2시 59분이다. 심호흡을 하곤 자연스럽게 슬쩍 뒤로 돌아 코엑스 건물 쪽을 살펴본다. 케이사이지니의 화면은 어느새 명품 가방의 광고로 바뀌어 있다.
다시 도로 쪽으로 몸을 돌려 건너편의 인도로 오가는 행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이쪽을 향해 바라보거나 멈춰서 있는 행인은 없다. 바로 그때 내 앞을 지나가던 젊은 여성 두 명이 케이사이지니를 가리키며 발걸음을 멈춘다. 마주치며 지나가던 남성 일행도 케이사이지니를 올려다보며 멈춰 선다.
무슨 광고로 바뀌었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지 궁금해 뒤돌아선다. 어느새 하얀색 바탕으로 바뀐 케이사이지니의 거대한 화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마치 파도에 몸을 맡긴 듯 일렁이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정말 많이 사랑해요.’
또 그 광고다. 그런데 이번엔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다. 광고주에 대한 단서가 들어 있나 싶어 자세히 읽어 보지만, 그와 관련된 문구는 없는 것 같다. 그때 거대한 광고판의 우측 하단 밑자락에 자리 잡은 조그만 글자들이 눈에 띈다.
아까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이 광고의 정체가 거기 들어 있나 싶어 시선을 집중시키는데, 의외의 문구가 적혀 있다.
‘리누스 토르발스’
이건 맞춤법 검사기를 통해 나를 여기로 유도한 이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일정 체크 때 자주 사용하는 캘린더 앱을 켠다. 4월 29일, 오늘의 음력 날짜를 확인해보니 3월 29일이다. 바로 내 생일이다.
아! 아! 이 세상에서 나를 아빠로 부르면서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은 소울이뿐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튀어나오는 찌릿한 전기 같은 기운이 심장을 옥죄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아내가 박제된 이후 소울이가 대신 내 생일을 꼬박꼬박 챙겨왔다. 그렇게라도 해야 적적해진 집안 분위기를 살릴 것 같아 나도 소울이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아니, 우리 가족들의 생일 파티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성대하게 치러졌다. 내 생일뿐만 아니라 아내, 소울이의 생일 때 우리 세 명은 함께 모여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자르고 각자 준비한 선물을 주곤 했다. 물론 아내는 생일 파티 내내 침대에 박제된 채 병실의 하얀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는 상태이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케이사이지니의 화면은 어느새 이온음료의 광고 영상으로 바뀌어 있다. 나와 함께 광고판을 바라보던 행인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기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계속 거대한 화면을 바라본다. 꼼짝 않고 30분을 넘게 바라보지만, 생일 축하 문구는 다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삼성역으로 향한다. 지하철 출입구로 들어서기 전에 뒤돌아보니 케이사이지니는 자동차 광고를 하며 여전히 본래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지하철 승강장으로 들어서서 역내의 영상 광고판을 계속 주시하지만 아까의 ‘아빠, 생신 축하드려요’라는 문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열차를 탑승한 뒤 출입구 상단에 부착된 동영상 광고판을 내내 바라본다. 그러나 역시 생일 축하 문구는 단 한 번도 송출되지 않는다. 대림역에서 내려 7호선으로 환승하는 동안에도 나는 계속 광고판을 주시하면서 걷는다. 하지만 스크린도어에도 에스컬레이터에도 환승 통로 어디에도 더 이상 아까의 광고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센서가 있는 것처럼 나를 따라다니던 광고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사라졌다. 환승 통로를 몇 번이나 오가다가 나는 결국 7호선 전철을 타고 집으로 향한다.
전철에서 내린 나는 우리 아파트 건너편의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맞은편의 버스정류장을 멍하니 바라본다. 정류장 뒤쪽의 인조석 위에 햇살이 배를 깔고 앉아 있다. 이젠 헛것마저 보이는 모양이다. 연한 오렌지색의 털을 가진 고양이가 어디 한두 마리인가.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자 나는 아파트 정문이 아닌 버스정류장 쪽으로 향한다. 고양이는 내가 햇살과 처음 만났을 때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가까이서 보니 햇살과 똑같다. 아니, 정말 햇살이다. 나는 손을 뻗어 햇살의 등을 쓰다듬는다.
햇살은 반갑다는 듯 미야옹 미야옹 하며 울어댄다. 가출한 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되었지만, 햇살의 겉모습은 깨끗하다. 먹이도 어디서 얻어먹었는지 별로 여윈 것 같지 않다.
“소울이가 오니까 너도 왔구나. 자, 이제 아빠랑 집에 가자.”
나는 햇살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향한다. 햇살은 내 품에 안겨 그르렁 그르렁거리며 골골송을 부른다. 기분이 좋고 편하다는 의미다. 집으로 들어와 현관 앞에 내려놓으니 햇살은 캣타워가 있는 자기 방으로 슬그머니 들어간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라도 난 듯 맞은편의 소울이 방으로 들어가 책상 위로 훌쩍 뛰어오른다.
“소울이 형은 없으니까 이제 나랑 단둘이 살자. 다시는 가출하지 마.”
나는 책상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햇살을 위해 작은 방에 있던 야옹토이를 가져와 작동시켜 준다. 간식이 든 실리콘 공이 튀어나오고 깃털이 살랑거리며 방울을 흔들어대도 햇살은 소울이 책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아직은 약간 어색해하는 햇살을 그대로 둔 채 내 방으로 들어와 컴퓨터를 켠다. 그리고 단풍이야기의 아이콘을 눌러 실행시킨다. 패치 프로그램이 실행되고 2차 비밀번호를 누르니 B라코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B라코차는 내가 보라매날다를 찾기 위해 다니던 마을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아직 학원 마칠 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평소엔 가끔씩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게임 캐릭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텅 빈 마을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B라코차의 모습이 마치 내 자신 같다.
바로 그때 게임 화면 위에서 분홍색 꽃들이 내려온다. 마치 봄바람에 벚꽃이 흩날리듯 B라코차가 서 있는 주변으로 꽃들이 흩날린다. 화면 중앙에 새로 나타난 직사각형의 창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보라매날다 님의 꽃송이 : 생신 축하드려요’
나는 재빨리 친구 찾기를 실행시켜 보라매날다를 입력한다. 하지만 보라매날다는 검색되지 않는다. 나는 단풍이야기의 아이템을 파는 캐시샵으로 들어가 방금 꽃들을 흩날린 아이템이 무엇인지 찾는다.
B라코차 주변에 뿌려진 것은 ‘꽃뿌리기’란 캐시 아이템이다. 게임 캐릭터가 자신이 원하는 메시지를 입력하면 30초간 꽃이 뿌려지는 기능이 있다. 나는 그 아이템을 구입해 메시지 입력난에 ‘고마워’라고 적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다음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 말만 적고 그냥 엔터키를 누른다. 그러자 ‘B라코차 님의 꽃송이 : 고마워’라는 창이 뜨면서 화면 전체에 다시 분홍색 꽃송이가 흩날린다.
내가 항상 소울이를 생각하듯이 소울이도 어디선가 항상 나를 지켜보고 있다.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그곳이 어디이든 상관없다. 그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다. 나는 모니터 화면에 대고 조용히 속삭여 본다.
“소울아, 정말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