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보기
시야는 무엇 때문에 좁아지고, 또 넓어질까. 우리는 가끔 분명히 보았지만 알지 못한다. 어떤 것은 분간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 채로 배경처럼 묻어있다. 물체든 추상적 진실이든, 분명한 것은 인식과 자각에는 일종의 부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주 자연스러운 경우, 그러니까 자연스럽다는 느낌조차 없을 정도로 스며들어 있을 경우 우리는 감각하지 못한다. 인지적인 사고 활동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이승우의 <사랑의 생애>에선 오래 알던 이의 낯익은 귀가 생경해진 주인공이 그제야 자각한 하트 모양 귓바퀴에 혼란해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항상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다녔으므로, 그리고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니었으므로 그녀의 귀를 볼 기회는 많았다. 귀는 본질적으로 감춰져 있는 신체 기관이 아니다. 눈이나 코처럼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배꼽이나 생식기처럼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누구도 굳이 감추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한 번도 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왜 처음 보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일까. 왜 낯익은 느낌이 아니라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 '낯섦' 때문에 그의 사랑이 시작된다. 이처럼 늘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보게' 되는 일은, 사랑을 시작시킬 만한 사건 같은 사건이다.
알 수 없는 사실들이 세상엔 너무나 많다. 아니, 알 수 있지만 혹은 알고 있지만 내 시야의 가림막 때문에 보지 않았고 보지 못했던 사실들이 더 많을 테다.
설 연휴 전, 서울엔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린 다음날 아침 여덟 시 사십 분 경, 본가에 가기 위해서 도착한 서울역은 눈이 부시도록 깨끗했다. 깨끗한 길을 당연하게 밟으며, 그러니까 밟다가... 보이지 않던 사실이 보였다. 당연하게 깨끗한 이곳을 밟고 있다는 사실. 그것을 인지하자 어색하기 그지없는 낯섦이 당연함을 가로질렀다. 낯섦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눈이 치워지지 않은 상태였더라면, 그래서 신발이 눈으로 더러워졌더라면, 나는 불만스러웠을까? 불만이 당연했을까?
동이 틀 무렵, 혹은 동이 트기 전에, 명절을 맞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전까지 밤새 내린 눈을 아침 내내 치우는 사람들이 있다. 봤기 때문에 기억한다. 기억하기 때문에 잊을 수도 없어졌다. 그들의 존재와 노동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 그 당연하지 않은 일에 대한 불만이 당연해지기 전에 보게 되어 다행스러웠다.
영어에 hide in plain sight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 말로 하자면,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뜻일테다. 우리의 시야는 가끔 뻔히 보이는 걸 가린다. 시야의 넓고 좁음은 실은 보고자 하는 나의 의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사건 같은 사건이 일어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