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방에 내가 없다 9화
혼자 보내기엔 짧지만 아이와 함께라면 긴 주말의 뮤지컬 관람은 하루 반나절이 순식간에 흐르게 하는 마술이었으며 아이에게 즐거운 추억이자, 적절한 문화생활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좋은 엄마이고 싶은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공주님이 등장하는 어린이용 뮤지컬이었지만 이런 문화생활이 오랜만이라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티니핑 뮤지컬을 보기 위해 부지런히 서울로 향했다. 바람은 꽤 차가웠고 길가의 바싹 말라버린 나뭇잎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걸 쳐다보니 괜히 휑뎅그렁했다.
나는 문화생활 좀 즐길 줄 아는 아가씨였다. 내 가방 안에는 늘 일본소설이나 산문집 같은 책 한 권, 다양한 장르의 음악으로 늘 용량이 버거웠던 MP3, 지난주 다녀온 미술 전시회에서 구입한 예쁜 엽서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영화티켓이 들어 있곤 했다. 독서, 음악감상, 전시회관람, 영화 보기, 모두 좋아했지만 특히 뮤지컬을 좋아했다. 하지만 평범한 대학생에게 늦은 시간 서울에서 하는 몇 만 원짜리 뮤지컬 공연은 큰 결심이 필요한 사치였다. 몇 달에 걸쳐 모은 용돈으로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밤하늘과 길거리의 서늘한 밤공기는 낭만이었고 그 벅찬 마음은 그날 밤 꿈에서 나를 뮤지컬의 주연배우로 변신시켜 주곤 했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티니핑 공연장으로 들어가는 아이와 남편의 뒷모습이 사랑스러워 절로 미소가 나왔다. 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주고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아이의 옷을 잘 챙겨주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준 후 무대를 보는 순간, 울컥 눈물이 고였다. 공연장이 어두워지고 그 누구도 나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순간이 되자 눈물이 흘러내렸다. 무대 위로 눈이 부신 조명이 비추고 배우들이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화려한 무대, 신나는 음악, 흥겨운 율동이 그저 흐릿하기만 했다.
가방을 뒤적거려 보지만 눈물을 닦을만한 것이 없었다. 아이 간식과 물병, 물티슈와 소독티슈까지 챙겼는데 고작 내 눈물 하나 닦을 휴지 한 장 없었다. 훌쩍거리거나 손을 눈가로 가져가면 내 우는 모습을 남편과 아이에게 들킬 것 같아서 눈물인지 콧물인지 흐르는 것들을 그냥 두었다.
그 눈물은 오랜만에 뮤지컬을 보러 온 것에 대한 감격이 아니었다.
20년쯤 되었을까. 뮤지컬을 보고 돌아오는 길, 문득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행인 건지 아쉬운 건지, 막상 나에게는 그만한 뜨거운 용기나 열정은 없었다. 그리고 그 꿈은 금세 사라졌지만 잠깐이라도 그런 꿈이 있었다는 것이 즐거운 추억이었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나의 장래희망은 인류의 건강과 세계 의학발전에 힘쓰는 의사는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고, 잘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나의 직업과 적절히 조화롭게 하여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늘 설레고 기대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그리고 이루어지지 않을 꿈에도 즐거워했다.
그러나 출산과 육아, 늦어진 전공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내, 엄마, 딸, 며느리로서의 모든 역할과 충돌했다. 얼마나 많이 부딪혔을까.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많다고 믿었던 나의 신념에 멍이 들었다. 주어진 역할과 의무를 해내기도 버거웠다. 나에게 남은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 엄마, 딸, 며느리인 나와 돈을 벌기 위한 생계수단인 직업뿐이었다.
이제는 음악소리가 있으면 집중이 잘 안 되어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영화관은커녕 TV와 셋톱의 전원 코드도 좀처럼 꽂을 일이 없다. 영화나 전시를 보러 갈 시간보다도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낭만적이었던 그 아가씨는 어디로 갔을까.
예전에 무엇을 그리도 많이 좋아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알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들을 잘 해내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디딜 곳은 한 없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오늘 하루 별 탈 없이 조용히 업무를 마치고 아이의 식사를 챙기고 집안을 잘 정리하는 것만 해내도 무사한 것이 현실이다.
그 언젠가 나는 뮤지컬 배우도 해보고 싶었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과 하고 싶은 것들, 할 수 있는 것들을 종이에 적곤 했었다. 그건 직업처럼 한 단어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었고 결과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더 나은 나의 모습에 대한 고민, 그 가능성과 열망에 대한 설렘, 도전과 실패를 통해 단단해지는, 나를 담금질하는 과정이었다. 나의 장래희망은 그 과정 자체였다.
티니핑 뮤지컬을 보러 가서 나는 울었다. 가방 속 눈물을 닦을 휴지가 없어 하염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손등 위로 떨어졌다. 뜨겁고 차가운 눈물에 괜히 손등을 문지른다.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
아이에게 꿈을 가지고 살라고 말하면서 정작 그러지 못하는 못난 엄마임이 창피하고 들키기 싫어서.
가방 속엔 눈물 닦을 휴지만 없는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많았던 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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