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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담는 가방

내 가방에 내가 없다 10화

by 김수다

4는 늘 찜찜한 숫자다.

여전히 많은 병원과 호텔에서는 3층 다음을 5층이나 F로 표기하고 우연히 본 시계가 4시 44분일 때 우리는 묘한 불쾌감을 느낀다.

마치 이름을 빨간색 펜으로 쓸 때처럼.

그래서일까. 마흔이 된다는 건 기대보다는 두려움이었다.

인생의 절반을 보낸 나이.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남은 나이.

거울을 보는 일이 괜히 낯설고 나의 이름이 어색한 나이.

40이라는 나이는 그렇게 우리를 찾아온다.



나는 마흔이 되고, 딸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부모가 된다는 핑계로 퇴직을 하고 전업주부가 되었다.

오랜만에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은 딸은 엄마는 밥도 맛없게 한다며 투덜거렸다. 남편은 가끔 신을 양말이 없는데 빨래는 언제 하냐고 불만을 토했다.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내가 딱했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다시 취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구인사이트를 뒤져보기도 했다.


마음이 번잡하고 생각이 복잡할 때에는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다.

집안의 물건을 모두 꺼내 버리고 비워냈다. 마치 배웅과 마중처럼.

깔끔하진 집을 보면 내 마음도 정리된 것 같았다.

깊은 밤, 일찍 잠들었던 탓인지 절로 눈이 떠졌다.

조용히 나와 서재방으로 들어갔다.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모르는 척했던 방, 도통 들어올 일이 없어 창고처럼 쓰이던 방.

불을 켜니 방 한쪽 벽면 가득 책들이 보였다. 문득 잃어버린 시간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방황하던 시절, 나를 붙들어준 것은 책이었다.

현실을 잊고 싶어 책 속에 빠져 들었다.

즐거움을 찾기 위해 책을 펼쳤다.

아는 게 많은 사람이 되고 싶어 책을 읽었다.

그리고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닻을 내렸다.

책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었고, 책을 읽는 것은 곧 나를 읽는 것이었다.

책장의 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책 위의 먼지가 날리며 고동이 일었다.

몰입과 해방, 공감과 연민, 성찰과 깨달음, 치유와 회복 – 책은 나의 마음에 지진을 일으켰다.

갈라지고 흔들리는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를 마주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웅크리고 울고 있던 어린 나,

무거운 책가방에 버거워했던 나,

예쁜 가방에 꿈과 사랑을 담았던 젊은 나,

살림과 육아에 허덕이는 지금의 나,

오래 살아온 만큼 단단해진 고집과 상실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미래의 쇠약한 나를.

그리고 나는 그런 나를 쓰기로 했다. 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조금 더 나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선명한 흔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다정한 위로를 건네기 위해.

오늘도 나는 가방에 작은 태블릿과 휴대용 키보드, 책 한 권을 거울 대신 담는다. 그렇게 내 가방에 나를 담는다.



<함께 하는 작가들>

지혜여니 https://brunch.co.kr/@youni1006

따름 https://brunch.co.kr/@blueprint22

다정한 태쁘 https://brunch.co.kr/@taei2411

김수다 https://brunch.co.kr/@talksomething

바람꽃 https://brunch.co.kr/@baramflower-jin

아델린 https://brunch.co.kr/@adeline

한빛나 https://brunch.co.kr/@growdream

새봄 https://brunch.co.kr/@spring-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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