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속 이야기 9화
특별할 일 하나 없을 것 같은 월요일 아침, 밸런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다음 날도 아닌데, 사후피임약 처방을 위해 내원하는 환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사람들의 삶은 이렇게나 뜨겁고, 이렇게도 예측 불가능하다.
사후피임약에는 크게 레보노게스트렐(levonogestrel, LNG)과 울리프리스탈 아세테이트(ulipristal acetate, UPA)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모두 배란을 억제하여 임신을 예방하는 효과를 갖는다.
레보노게스트렐은 성관계 후 3일 이내 (24시간 이내 복용한 경우 약 95%, 3일째 복용한 경우 약 65%의 피임효과) 복용 가능하며 이미 배란된 이후라면 피임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울리프리스탈 아세테이트(ulipristal acetate, UPA)는 배란 억제뿐 아니라 배란 지연, 착상 방해 효과까지 더하여 임신을 예방하며 성관계 후 5일 이내 (24시간 이내 복용 시 98%까지 피임 효과) 복용할 수 있다.
두 약 모두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복용하는 것이 좋은데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고 빨리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런 일에도 어김없이 유효한 걸로 봐서는 진리는 진리인 듯싶다.
복용 3시간 이내 구토하게 되면 다시 복용해야 하며 고용량의 호르몬을 포함하는 약이기에 부정출혈, 생리불순, 여드름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약은 이미 이루어진 임신을 되돌리는 낙태약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100% 피임효과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추후 반드시 임신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전피임약은 처방전이 없어도 약국에서 만 원 정도면 쉽게 구할 수 있지만 사후피임약은 무조건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 의사의 상담과 진료를 통한 적절한 설명과 이해가 필요한 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들에게 이왕 병원에 온 김에 생리주기라도 물어보고, 초음파로 배란 여부도 확인도 권유하고, 앞으로 피임법까지 설명해주고 싶지만 대부분은 괜찮아요, 다음에요,라고 말하며 빨리 처방전을 받고 나가고 싶어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사후’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낙인 때문은 아닌지.
사후피임약은 말 그대로 일이 있은 ‘후’에 먹는 피임약이다. ‘사후’라는 말에는 이미 늦었다는 후회, 순결하지 않다는 가책, 자기 몸 하나 단속하지 못했다는 책망이 느껴진다.
사후피임약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환자는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이 되고, 의사의 설명은 잔소리가 된다. 그렇게 진료실의 문은 너무나 빠르게 닫혀버린다.
사후피임약의 올바른 명칭은 ‘응급피임약(emergency contraceptive)’이다.
콘돔이 찢어졌거나, 피임약을 하루 빠뜨렸거나,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성폭행과 같은 사고 후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약이다. 피임에 실패한 여자가 죄를 씻기 위해 먹는 속죄의 약이 아니다.
가끔은 처방 버튼을 클릭할 때마다 충동적으로 보낸 지난 뜨거운 밤에 대한 책임이나 비난을 피하기 위한 면죄부를 주는 건 아닐까 하는 심란함에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다. 순간의 욕망과 그 후의 걱정, 후회, 책임이라는 감정들은 얼마나 모순적인지.
하지만 사후피임약을 먹는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낄 이유는 없다. 우리는 삶에서 무수히 많은 상황을 맞고 그때마다 응급조치를 취하며 살고 있으니까. 피임 역시 그러한 응급 대응 중 하나이지 사후 벌칙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 한 행위에 대한 책임이 여자에게만, 불안과 후회, 죄책감의 무게로 얹힌다는 것이 억울하지만 이런 불공평 때문에 여자들이 성에 있어 서 좀 더 주체적으로 선택할 권리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오빠만 믿어, 내가 다 책임질게 - 이런 말에 인생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순간에도 내 몸에 대한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는 거니까.
찰나의 밤은 짧지만 흔적은 길다.
욕망과 책임은 늘 함께 한다.
순간의 감정이 늘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는 건, 여자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이다.
잘못은 사랑이나 욕망이 아니라, 그 뒤에 남겨진 책임을 여자 혼자 감당하게 만드는 분위기다. 그래서 우리는 내 몸과 삶에 대한 선택권이 스스로를 향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가장 단단한 방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