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케이키 - 카후나의 난임일기
남편과 멀어졌다. 아기를 기다리다가 결혼생활에 위기가 찾아 왔다.
시험관 3차에 유산을 하고, 4차가 순식간에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5차에 조기 배란 사건까지 겹쳤다. 원, 투, 쓰리 펀치를 맞고 쓰러졌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드는 감정이 ‘우울하다’ 였다. 남편은 그 칙칙한 표정을 매일 보고 있었다. 그도 나름대로 아내를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때마다 더 극성으로 싸우기만 했다.
시험관 5차, 문제의 조기 배란을 겪은 다음 날이었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식히려고 남편과 한강 산책에 나섰다. 그날 따라 길에 귀여운 강아지들도 많았고, 하늘에 구름도 뭉게뭉게 예뻤지만, 감정은 차분해지지 않았다. 더 격해졌다. 남편과 아무 대화 없이 걷다가 툭 말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을 것 같아.”
진짜 죽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상황이 벅차고 견디기 힘들다는 걸 최대한 힘줘서 표현한다는 게 말이 그렇게 나왔다. 남편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눈이 벌게지더니 앞서 걷고 있는 나를 멈춰 세웠다.
그제야 남편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진심이 아니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그는 나를 세게 안더니 죽지말라고 말하며 한참 울었다. (문화 차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남편은 직설화법에 익숙한 독일인이거든요.)
이 일은 충격적이었다. 남편을 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그의 고통에 대해 헤아려 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힘들어도 웬만해서는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 마음을 알기가 더 어려웠다. 주사도 나만 맞고, 병원도 나만 가고, 유산으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것도 나였다. 남편이 그 정도로 힘들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힘들어도 나만큼 힘들겠어, 이런 마음이었다.
일기에 ‘나는’으로 시작해 너무 힘들다는 문장만 빼곡히 채우다, ‘남편은’으로 문장을 시작해 보았다. 그의 마음을 읽어 보려고 노력했다. 그의 마음을 유추하고 물어보는 방식으로 조금씩 그의 고통에 다가갔다.
첫 번째로 무력감을 떠올렸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그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자기가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낀다고 말했다. 아무리 도움이 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주사 맞는 것을 보며 대신 맞을 수도 없고, 비 오는 날 힘들게 병원에 도착해 세 시간씩 대기하는 모습을 보며 대신 가줄 수도 없다고. 시험관은 남편이 할 수 있는 게 너무 적어서 자신을 더 무력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기분을 풀어 주려 노력할수록 나는 우는 얼굴이 되었다. 꽃을 사오면 이런 쓰레기를 사 왔느냐고 핀잔하고, 발 마사지를 해줘도 이렇게밖에 못 하느냐고 쏘아대니 마음이 자꾸 상했단다. 고민하고 노력할수록 갈등이 더욱 심해지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피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했다.
미안하다고도 했다. 죄책감이 있다고. 자신의 난임 원인으로 내 인생이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그렇다고. 앞으로 두 번만 더 해보고 잘 안되면 나를 떠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얼마나 슬펐는지 모른다. 몇 시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임신이고, 자녀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남편을 잃으면.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가 아니다. 남편과 함께하는 삶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어리석게 그제야 깨달았다.
당시 남편의 고통에는 ‘타이밍'의 문제도 있었다. 시험관을 시도하면 곧 임신이 될 줄 알았는데, 벌써 5차까지 온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10번, 20번을 더 한다고 임신이 되기는 할까. 믿음에서 의심으로 기울어지는 타이밍이었다. 금방 고칠 수 있는 병인 줄 알고 입원했는데, 갑자기 “불치병입니다”라고 통보 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중에 난임 동료들과 이야기해 보니, 대체로 6~7차를 겪으면 이렇게 기울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이때가 2022년 1월, 연초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역술인을 찾아 갔다. 그 곳에서 들은 말 중 다른 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딱 하나 강렬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사주를 보던 분이 흰 종이에 사람을 그리고 그 앞과 뒤에 큰 산을 그렸다. 이게 남편의 마음이라고 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도 없는 상황에 갇힌 사람의 사주라고.
사주 같은 게 다 무어냐며 믿음이라곤 없는 그가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거기까지 다녀왔냐'는 눈빛이었다. 이어 산과 사람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는 '어떻게 본인 마음을 그렇게 정확하게 표현했냐'며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사주 보러 간 나를 무식한 사람 취급하며 놀리던 남편의 태도가 갑자기 변했다.
시험관이 무조건 우선이었는데, 그 길로 우선순위를 교체했다. 우리의 현재 결혼 생활을 최우선으로 올렸다. 결국 중요한 사람은 남편이구나. 나랑 남편이 잘 사는 게 훨씬 중요하구나.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아기가 아니라. 이 간단한 것을 깨닫고 남편이 좋아하는 것을 많이 하려고 했다. 바다만 보면 기분이 확 풀리는 그를 위해 양양에 자주 갔고, 소원이라고 해서 적금을 깨 하와이에도 다녀왔다. 시험관 때문에 식단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었는데, 금요일마다 그의 소울푸드인 피자도 먹고 수제 맥주도 찾아 마시며, 순수하게 현재 남편과의 삶에 집중했다. 남편이 신난 모습을 보면서 내 우울도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지난 3년간 난임이라는 위기를 함께 겪으며 남편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이전에는 남편의 표정을 잘 읽지 못했다. 표정에 인색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남편의 감정선 자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무던한 사람이라고 나 편할 대로 생각했다.
아기를 기다리면서 함께 두려워하고, 같이 손톱을 물어뜯고, 난임 검사부터 출산까지 4년간 촘촘히 배치된 허들을 함께 넘으며 그의 감정을 배웠다. 이제는 그가 느끼는 것이 신속하게 나에게 전염된다. 잠시 눈만 마주쳐도, 몇 초 통화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게 되어버렸다. 지금 답답한지, 편안한지, 울고 싶은지, 심지어 배고픈지.
내 생의 가장 큰 좌절과 가장 큰 환희의 순간 곁에 있었던 것은 오직 남편뿐이었다. 처음 임신한 아기를 하늘로 보냈을 때 눈물을 닦아준 사람도, 시험관 실패할 때마다 낙담하지 않게 해 준 것도 남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매일 싸운다. 오늘 아침에도 설거지를 안 했다고 다퉜다. 그러다 이렇게 지난 날을 다시 보며 다짐하게 된다. 앞으로도 남편의 웃는 모습에 우선순위를 두어야지. 내가 웃는 모습도 자주 보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