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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읽는 시간

by 이윤지

나는 전시회에 가본 적이 별로 없다. 미술관보다 도서관이 더 익숙했고, 갤러리보다 서점이 더 가까웠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내 일상에서 멀리 있었고, 그림은 늘 책 속에 갇혀 있었다. 화가의 삶과 붓의 방향, 그림 속 상징과 색채의 조화는 전부 활자로만 배웠다. 누군가는 그림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인다고 했고, 누군가는 눈물이 핑 돌았다고 했다. 나는 그 ‘누군가’가 되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예술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거라고 말하지만, 나는 늘 그것을 ‘읽고,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접해왔다. 누군가는 그것을 너무 건조한 태도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게 예술과 맺는 가장 자연스러운 첫 관계였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었다. 나는 글을 좋아하고, 단어가 문장으로 이어지는 그 촘촘한 리듬을 사랑했다. 고전 문학의 구절들을 곱씹으며, 문장의 결을 손끝으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각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림은 감상보다 해석의 대상으로 여겨졌고, 미술은 감정보다 의미의 영역에서만 존재했다. 박물관에서는 귀퉁이의 해설을 먼저 훑었고, 공연을 볼 때는 연출자의 말이나 안내 책자에 더 마음이 갔다. 이런 것들로 부족하다면 ‘이건 뭐지?’라는 혼잣말로 지나친 적이 수두룩하다. 특히 미술관은 조용히 걷고 나오는 곳이라 생각했다. 그 공간에서 무엇을 느껴야 할지 도통 모르는 상태였다. 르네상스는 어떤 시대였는지, 피카소는 왜 형태를 부숴야 했는지, 고흐가 노란색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지. 나는 그것에 대해 누군가 쓴 글을 통해 접근했다. 예술을 머리로 배운 셈이다.

예술을 글로 배운다는 것의 장점은 분명하다. 작품 하나에 수많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 먼저 배웠다. 큐레이터의 전시 해설, 예술가의 자서전, 철학자의 에세이, 평론가의 분석은 예술을 둘러싼 의미의 숲을 만들어주었다. 이해할 수 없던 한 점의 그림도, 누군가의 문장 하나 덕분에 마음에 걸리는 장면으로 변하곤 했다. 책은 늘 나보다 앞서간 이들이 남긴 길잡이였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서툴게나마 예술의 숲에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 방식엔 단점도 있다. 예술이란 본디 머리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미술 작품 앞에서 마주치는 감정의 생동, 무용수의 몸짓이 품은 침묵, 전시 공간의 공기와 동선, 음악의 진동 같은 것들은 책에 담기지 않는다. 활자는 아름답지만, 때로는 예술의 촉감을 가두는 틀로 작용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틀 안에 갇혀 있었다. 예술을 ‘이해’하려는 강박이, 그것을 ‘느끼는’ 능력을 제한한 것이다.

더불어 늘 무언가 빠진 느낌이었다. 그림을 배운다면서도 정작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작품 원본은 압도적인 크기와 색채에서 나오는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느끼는 건 늘 손바닥만한 인쇄물과 분석적인 감정뿐이었다. 감탄 대신 해석, 몰입 대신 거리두기. 나는 그 경계 안에서만 미술을 이해하고 있었다. 마음 한 편이 계속 불편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장에 직접 가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책을 읽어 내려가던 도중에 한 위로에 도달했다. 글과 그림이 닮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두 예술 모두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가 만나는 공간이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작가의 생각을 상상하고, 그림을 볼 때도 우리는 화가의 손끝과 눈길이 머물렀던 세계를 추측하게 된다. 둘 다 작품 너머의 사람을 상상하게 만든다. 언어이든 색채이든, 중요한 건 표현 그 자체보다 그 안에 담긴 ‘사람’이다. 글을 쓰며 내가 가장 애틋하게 느끼는 지점과, 그림이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 방식이 겹쳐 보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림은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글로만 배운 예술, 실제로 만져보지 못한 감각, 정답처럼 정리된 이론 속에서 길을 잃은 감정. 나는 여전히 전시회에 가지 않았지만, 그림을 보는 나의 방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더는 이 그림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보다는, ‘이 그림이 나에게 어떤 문장을 만들어내는가’를 먼저 묻기 시작했다. 어떤 그림은 하나의 단어가 되었고, 어떤 그림은 긴 문단이 되어 나를 따라왔다.

물론, 이것이 가장 좋은 감상 방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에겐 그림이 주는 물리적인 압도감이 없다. 색의 결을 직접 눈으로 느끼는 순간도 없고, 그림 앞에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경험도 아직은 없다. 이것이 내가 가진 한계이고, 동시에 내가 잃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글을 통해 그림을 오래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한 작품을 마주하고 수십 번 읽고 다시 써보는 과정에서, 나는 그 그림을 종이 위에서만큼은 진심으로 만난다고 믿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언젠가 진짜로 미술관에 간다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짓게 될까. 과연 지금껏 글로 쌓아온 이미지들이 무너질까, 아니면 더 깊어질까. 어쩌면 그림 앞에서 나는 말문이 막힐지도 모른다. 어떤 글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고, 혹은 반대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아 당황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나는 여전히 ‘글로 그림을 만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나는, 한 장의 그림을 글로 읽고 있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본 풍경을 단어로 옮기고 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감상이며, 가장 나다운 방식의 예술이다.

미술은 언어 이전의 언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순간들을 품고 있고, 설명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들을 가진다. 나는 그 감정들을 문장으로 번역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 내가 미술을 사랑하는 방식은 다소 서툴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에 가까울지라도, 그 안에는 분명히 진심이 있다.

책은 여전히 나의 출발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모른다’는 감정에 익숙해졌고, 그 모름 속에서 천천히 내 감각을 키워나가는 중이다. 어쩌면 예술 초보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잘 아는’ 게 아니라, ‘모를 줄 아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예술이란 길엔 정답이 없다는 말, 그 말도 책에서 처음 읽었지만, 이제는 조금쯤 내 몸으로도 느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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