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내가 브랜드를 운영해 온 지난 세월을 쭉 돌이켜보면,
고객에게 고백 공격을 하느라 바빴던 것 같다.
내 이름 기억해 줘
내 브랜드가 추구하는 가치는 이것이니 알고 있어
내 제품을 좋아해 줘
그냥 좀 나를 이유 없이 열렬히 사랑해 줘!
우리 브랜드의 인스타그램 게시글과
길거리를 지날 때, 먹을 생각도 없는데 손에 억지로 쥐어줘
덜컥 받아버린 술집 전단지가 다를 바가 무엇일까.
1.
'흑백요리사' 3화
[본업도 잘하는 남자] 오스틴 강에 대한
안성재 셰프의 심사평이
고백 공격을 해대는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오스틴 강은
미국 LA에서 나고 자란 본인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기 위해
멕시칸 양념에 재운 갈빗살과
고추장 소스, 깻잎 페스토, 포트와인, 살사 등을 조합하여 요리하였다.
이후 어떤 요리냐는 질문에
'I don't know. 그냥 저?예요'라며
명확한 설명 없이 요리를 내어놓았는데
이에 대해 안성재는 아래와 같이 심사했다.
"단순히 재료를 섞는다고 해서 절대 아이덴티티가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일을 하다 보면, 본업을 잘하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멕시칸 인플루언스가 들어가고
자연스럽게 한국이 들어가고 뭐 이런 거지
'뭘 해야 돼, 뭘 해야 돼' 하면 some bullshit이 될 수밖에 없어서
아직은 (콘셉트를) force 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다."
2.
'미국 아이덴티티를 말하더니 갑자기 멕시칸 포인트?
포르투갈 포트와인은 또 왜 나와?'
이러한 의문은 오스틴 강의 유튜브 인터뷰를 보고 나서야 해소되었다.
LA에는 멕시칸 푸드가 많고,
친척들과 어울려 바베큐를 할 때 늘 살사 소스와 와인을 곁들였다고 한다.
3.
아마 우리 브랜드의 글을 읽어본 사람들도
맥락 없는 요소들의 향연으로
의아함과 피로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힐링을 강요하고,
특별함을 주입하는 메시지에
강요당하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해지는 밤이다.
본업을 잘한다는 것은 내 업의 본질을 잘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본질 위에 내가 추구하는 가치들을 쌓아나가야 하는데,
나조차도 내가 서있는 땅과 목표점을 모르니
그저 있어 보이는 것들의 조합으로 버무려져
발신인도 의미를 모르는 고백 편지만 남발하고 있던 것이다.
4.
글을 다 작성하고 나니
사실 나의 고백을 받은 이가
고객이기라도 했으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세상을 향한 일방적인 고백 공격을 멈추고
나의 본업을 잘하는 브랜드로 거듭나고 싶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지내다 보니 매력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썸으로 발전했다,
마침내 연인이 되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