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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중독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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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드 입은 코끼리 Nov 01. 2024

중독

장편소설: 에어가 왜 집을 나가게 되었는가

최근에 드라마 <유포리아>를 보았다. 거기 나오는 서사의 주인공 루와 나의 모습이 상당히 비슷했다. 우리 둘 다 상실을 겪었다. 걔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나는 어머니를 잃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잠잠히 넘어가려고 노력했으나 생각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몇 년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어머니의 처절한 교통사고 현장이 발작하듯이 보였다. 숨이 멎어가는 그 10초, 흔들렸던 눈동자와 배회하던 손짓, 무엇보다도 한 방울 떨어지는 눈물 속에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때 심장이 멈추었다. 헉헉거리면서 그 손을 잡았는데, 결국 엄마는 못된 트럭에 치여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순간에 오던 정지. 삶의 정지가 지금 7년간 지속되고 있다. 그때 일은 내가 6살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에 나는 아빠를 무척이나 의지하고 살았지만 어머니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아빠는 모든 게 서툴렀다. 설거지도 제때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쌓여 있던 음식물 찌꺼기 처리는 일주일씩이나 걸려서 집 안에 사과가 썩고 고기가 부패했다. 그런 역겨운 냄새가 있음에도 우리는 부엌이 멀다는 이유로 멀리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당시에 이라크 전쟁이 발생했던 터라 자원해서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을 영웅으로 칭송했던 때였다. 성조기는 어디서든지 펄럭거렸다. 우리 집 역시 텍사스는 황폐하게 접어들었지만 성조기만큼은 창대히 높이 걸려 있었다.

옆에서 항상 걱정해 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나와 에밀리, 그리고 잭슨, 미셸, 오리아나, 델이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그 아이들이 챙겨주기보다는 그 집의 어머니들이 나를 챙겨주었다. 돌아가면서 그들의 어머니는 저녁때쯤 와서 나를 픽업해 갔다. 그리고 그 집에 가서는 푸짐한 저녁을 먹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먹었지만 허기진 상태는 가시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주는 푸짐한 닭 가슴살에 샐러드, 링귀니 파스타에 라구 소스를 얹어서 푸짐하게 주었다. 절대 나를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한시라도 고요함은 없었다. 그 당시 3년 동안은 적어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뒤룩뒤룩 살만 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살찌는 가슴과 배가 넘실거릴 때마다 더더욱 우울해지고 말았다. 나는 미국의 전형적인 비만인이라고 생각이 들면서 내 자신을 혐오하게 되었다.

예쁜 옷을 사다 줘도 울룩불룩한 모습에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의 음식으로는 배가 차지 않았다. 가시 덩굴 속에 뒹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마음이 너무나 어지러웠다. 학교에 가면 6명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예쁘게 자리 잡은 얼굴과 몸이었는데 나만 망가진 육신으로 버려진 것 같았다. 엄마가 없기에 먹을 것이 더더욱 풍족해지면서 기이하게 발생된 사건이었다.

13살의 나는 그때부터 면도칼날을 가지고 다니면서 학교를 다녔다.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죽기 위해 달려들 것 같은 불나방이 된 것이었다. 햄버거는 한 손에 집어 들고 콜라는 다른 손에 1리터짜리로 마시면서 트림을 꺼억대며 수업에 참여했다. 나는 결국에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다들 나의 이상한 행동에도 선생님이 지적해 주지도 않았다. 결국 마음이 상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회초리를 원했는데, 계속해서 주는 호의가 너무 싫증이 났다.

어느 날, 학교에서 총기 사고가 일어났다. 누가 총을 쏘고 학교에서 난잡하게 혼란이 일어난 날이었다. 그때 아이들은 책걸상 밑으로 숨고 절대 머리를 내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선생님은 차분히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나 역시 선생님 말씀을 따랐다. 그렇지만 내 거대한 몸집은 절대로 책걸상 밑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기어서 더 큰 교탁으로 가야 했다. 그 교탁으로 갈 때의 두려움은 마치 어머니의 죽음을 다시 맞이하는 일과 비슷했다. 머리에 곧 총을 맞을 것만 같았다. 학우들은 내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다들 두려움에 숨을 힘겹게 고르고 있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내 옆자리 폴이 내 이름을 불러줬다. "에어, 괜찮을 거야." 그 한마디가 결국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웅크려 총소리가 멈추기를 기도했다. 곧 경찰이 들이닥쳐 흉악범을 사살하면서 그 사건도 끝이 났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가끔 머릿속에 울리곤 했다. 특히 에밀리는 학교를 다니지 못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과호흡 증상이 일어났다. 그렇게 예쁘던 아이였는데, 완벽한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에밀리는 자퇴했다. 이제는 5명의 친구가 남았다. 여전히 어머니들이 나를 아껴주었지만 이제는 내 몸을 보고 강제로 다이어트를 시키고 운동을 시켰다. 각 집에서 돌아가며 하루에 2시간씩 운동을 하게 했다. 수영을 하거나 달리기를 했다. 광활한 운동장과 잔디밭이 많은 텍사스였고, 낮에는 집에서 3km만 떨어지지 않으면 안전했기에 우리는 자주 달렸다.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말이다. 그냥 달리곤 했다. 그렇게 나의 살이 빠지면서 조금씩 사람다워졌다.

저녁이 되면 닭 가슴살 샐러드만 주고, 한정적인 양으로만 주었다. 나는 그렇게 강제로 내 몸을 바꿔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학교의 뒷골목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언제나 선생님의 눈을 피해 다녔고, 쉬는 시간에 낙엽이나 흙먼지 속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들은 가끔 헐떡거리며 신음 소리를 내곤 했지만 그리 괴기스럽지 않았다. 뒷골목 친구들이 내 살이 빠지고 머릿결에 윤기가 나자 나를 불렀다. 그들이 내게 건네준 것은 아마 마리화나였던 것 같다. 마리화나 젤리도 있었다. 그리고 텍사스에서 합법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나에게 주었다. 그렇게 나도 마리화나를 배웠다. 마리화나를 피울 때마다 우리 엄마가 내 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엄마의 영혼과 내 영혼이 포개어지는 기분이었다. 차가우면서도 따스한 입김이 느껴졌다. 그래서 자주 그 뒷동네 애들과 어울려 다녔다. 틈이 나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6개월 정도 뒤, 아버지에게 들켰다. 내가 살이 빠지다가 갑자기 다시 살이 올랐다는 것이 이상했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내 숨소리가 고르지 않았기 때문에 들킨 것 같다.

그날 나는 엄청 맞았다. 아버지의 말채찍으로 말이다. 등과 손, 다리, 몸 모두 칼날 같은 상처를 입었다. 이젠 가정폭력의 시작인가 싶었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렸지만 나를 위한 눈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죄책감에 대한 눈물이었다. 그것이 나에게 버림받은 느낌을 주면서 죽음에 가까워질까 봐 두려웠다. 나는 당시 너무 어렸다. 겨우 17살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어머니의 금발이 내게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보호망이 내게는 더 이상 없었다. 같은 피붙이인데도 왜 아버지는 그렇게 나를 엄격하게 대하시고 우리를 보살펴주지 않는 것일까 싶었다. 그때도 여전히 우리 집은 하수도 냄새 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는 맥주병을 골라 마셨고 간신히 우리를 음주 운전하면서 학교에 내려주었다. 여자는 만나지 않았지만, 차라리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 컸다. 그는 우리를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8살이 되던 해, 나는 결국 자살을 결심했다. 나처럼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 한날 한시에 죽자는 사람들로 모여 자살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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