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과 재회하면서
송화는 오늘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거제도의 날씨는 화창했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견디기 어려워 잠에서 깬 것이다. 그는 일어나 집에 있던 건더기 시리얼을 간단하게 챙겨 먹었다. 살다 보니 번거로운 일들은 모두 간단하게 처리하자는 주의로 바뀐 지 오래였다. 과거에는 화려한 아침, 점심, 저녁을 기대했다가 위장이 긴장되는 기분을 느낀 적도 있었다. 그는 오로지 그림과 자신의 생계에만 충실하게 살다 보면 부산으로 가는 일도 가끔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부산에 가보니, 그곳은 산만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의 북적거림 속에서 낭만을 찾기에는 너무 어려웠다. 그는 유명한 카페 거리 쪽을 걷다가 눈길을 끄는 옷차림의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 장소에서 도파민이 강하게 분출된 탓에 원치 않은 신체 반응이 일어났다. 이는 그가 숨기고 싶은 부분이었지만, 공공장소에서는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그러다 빨간 간판이 보이는 술집이 눈에 띄었다. 어떤 곳인지 궁금해 들어가 보니 클럽이었다. 춤실력을 드러내기 어려운 그는 결국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하루는 저물어 갔다. 거제도로 돌아왔을 때의 편안함이 온몸을 감쌌고, 그는 평생 거제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이상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고, 그저 만난다면 솔을 만나 그림을 그려주고 싶을 뿐이었다. 장롱 속에 넣어둔 솔의 그림을 꺼내 보았다. 그녀의 모습은 붉지만 감각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의 손길은 물방울이 맺힌 듯한 순수함이 있었고, 그 순수함을 송화가 그려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웹툰 작업을 잠시 접어두고 솔을 떠올렸다. 그렇다고 당장 그 술집에 들어가면 솔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송화는 솔에 대한 열병에 시달렸다. 그는 계속해서 웹툰 작업을 했지만, 보통 12시간 안에 끝나던 작업이 이번에는 48시간이 넘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집중력의 부족을 자책하며, 밤에 더 열심히 했어야 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국 다시 그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에서는 늘 보던 얼굴들을 기억하며, 위스키와 커피를 각각 주문해 구석에 앉았다. 그 자리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양들의 침묵>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포스터는 소름 끼치면서도 카프카의 변신 같은 느낌을 주어 어려운 주제의 살인 이야기도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그날은 솔이 오지 않았다. 그는 솔에 대한 생각을 펼치며 작업을 이어갔다. 그녀가 옆에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 웹툰에 표현했을지 상상하면서. 외주 작업이다 보니 표현을 자제해야 했지만, 뒷배경은 솔로 채워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솔을 춤추는 모습으로, 풍성한 곱슬머리를 가진 여인으로 그려보았다. 자세히 보니 모두 같은 여성이지만,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해부학적으로 사람을 그리니 솔의 매력을 완전히 담아내지 못한 듯했다. 그래서 웹툰에는 단지 걸어놓기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위스키는 절반 정도 마셨고,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오늘은 목이 타오르는 위스키가 제법 어울리는 날이었다. 열정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3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친한 형은 저번 웹툰을 보고 그림체가 더 정교해졌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송화 자신도 이를 느꼈다. 실제 인물을 그리다 보니 그림이 더 정교해지고, 사람의 특징을 살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송화는 입술을 꼭 깨물며 집으로 향하는 길에 솔을 보았다. 그녀가 그의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솔은 바닷바람에 빨간 머리가 휘날리지 않도록 아래로 묶어 내리고 있었다. 송화는 그런 솔을 보자마자 얼어버렸다. 집에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그녀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 번 만난 사이였기에, 달빛에 가려진 그녀의 눈빛을 보며 그녀도 자신처럼 얼어 있음을 느꼈다.
송화는 집으로 들어가자며 솔을 초대했다. 늦은 시간이라 솔이 들어올지 모르겠었지만, 그녀는 선뜻 따라 들어왔다. 그의 집은 엉망이었다. 밖에서는 노란 벽돌이 밝게 비추어졌지만, 내부에는 시트지가 여기저기 난잡하게 붙어 있었고, 일부는 떨어져 있었다. 송화는 시트지를 다시 붙일 거라며 변명했지만, 솔은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집에는 수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솔은 그것을 보느라 바빴다.
“다 바다 씨가 그린 거예요?” 솔이 물었다. 송화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그림을 좋아했기에 자신이 그나마 자부심을 느끼는 작품들을 걸어두었다. 이렇게 여인에게 보여준 것은 처음이었다. 솔은 그의 그림을 천천히 감상했다. 초기 작품들은 유화가 아닌 물감으로 그려 디테일이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바다의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거제도에서 그린 작품들이라, 그림도 파도가 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늦은 시각이었기에 송화는 솔에게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내주었다. 송화가 아끼는 중국산 찻잔에 담긴 차를 솔은 한 바퀴 돌리며 감사의 말을 전하고 한 모금 마셨다. 솔은 캐모마일의 은은한 맛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송화에게 미안하다고, 아는 건 주소밖에 없어서 기다렸다고 말했다. 다행히 그날은 금요일이라 솔에게도 시간이 있었기에 기다릴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송화는 자신은 여전히 바에 있었고, 작업 중이었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송화도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술기운에 조금 더 자신 있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솔님을 그려도 될까요?”라고 정중히 물었다. 솔은 사랑스럽게 웃으며 선물을 받고 싶다며 정중히 부탁했다. 송화는 오늘은 스케치만이라도 해두고, 내일 다시 만나 완성해 주겠다며 약속했다. 그는 겉옷을 벗고 방 안에서 4B 연필을 찾아냈다.
송화는 솔의 얼굴부터 구조를 잡고 싶었다. 그래서 솔에게 가장 편한 식탁 의자에 앉아서 편히 이야기하며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다. 솔은 송화의 그림 생활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송화는 멀티태스킹이 어려웠지만, 자신의 인생사를 천천히 들려주었다. 거제도에서 살게 된 이유부터 시작해서 말이다. 그러다 보니 솔의 눈, 코, 얇은 입술까지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릿결까지 그려 나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새 새벽 5시가 되었다. 송화도 솔도 점점 졸려 보였다.
커피를 한 잔 더 타왔다. 이번에는 아이스커피 믹스였다. 두 잔을 빨간색 컵과 초록색 컵에 담아 주자, 솔은 빨간색 컵을 집어 들었다. 송화가 물었다, “왜 하필이면 붉은색이에요?” 솔은 정열적인 의미를 떠나, 붉은색이 가진 다양한 상징성 때문에 좋아한다고 했다. 피의 혁명을 떠올리기도 하고,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며, 태극기에도 그려진 의미 있는 색이라며 설명했다. 박애적인 솔이었다. 여러 의미를 지닌 색을 찾기 어려운데, 그 점에서한 가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 색을 찾기 어려운데 그것이 붉은색이었다니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솔의 얼굴과 포즈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 시간은 거의 6시 반이었다. 솔은 반쯤 눈이 감겨 있었고 언른집으로 돌아가야지 하면서도 식탁 의자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있는 이불을 주었다가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겠어서 보내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그래서 송화는 재촉였다. 그렇게 솔은 어슬렁거리면서 일어났다. 송화는 용기를 내어 솔에게 전화번호를 물었다. 그리고 솔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서 시간 날 때 그릴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솔은 이 소리를 듣고 조금 잠이 깼다. 자신이 원했던 물음이었기 때문이다. 솔은 그렇게 자신의 번호를 내주고 집을 떠났다. 언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솔의 밑그림을 채색하고 싶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물감으로는 부족하고 유화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서 있는 송화였다. 그리고 잠에 들기 위해 또 침대 위로 올라섰다. 그러니 잠이 들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자신의 뮤즈를 생각하며 잠이 오지 않았다. 커피를 두 잔 마셔서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