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정답, 색안경, 프레임
우리의 정의는 정답인가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던, 어떤 감정이 올라오던 과연 그것은 모두 정답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다.
예전에는 이런 개념조차 생각하지 못했을, 어린 세월들이 있었다.
정의는 누가 내리는 것인가.
기준이란 것은 누가 세우는 것인가.
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예의와 도덕을 배우며 자란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부당함과 불공평함을 느끼며 불편해야 하는가.
나이를 먹을수록, 아니.
많은 사람들을 거쳐보고, 많은 일들을 겪어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들이 떠올랐다.
초반 심리 상담공부에서 이런 내용을 읽은 것이 기억이 난다.
‘나’라는 존재는 즉, 성격과 기질, 성향 등은 누가 정의하는 가.
내 자신이 아닌 타인이다. 부모로부터, 처음 겪는 선생님들이나 친구들로부터.
나는 이 내용이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다.
태어나는 그 순간 부터 내 자아가 어느정도 형성이 되기 전까지는. 분명,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나’라는 인물이 정해진다.
“너는 **이라서~”, “너는 고집이 쎄”, “너는 소심해”, “A형이라 그런가 왜 이렇게 꽁하니?”
등의 말들.
그래서 육아가 중요한 것이다.
자아가 성립이 되기전 받게 되는 육아 과정에서 부모나 어른들이 명심해야 할 부분은, 말이다.
아이에게 어떤 말들을 들려주냐에 따라 아이는 전혀 다른 인생의 갈림길을 걷게 되며,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함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런 부정적인 정의와 같은 말들을, 정답인 것 처럼 듣게 되는 말들을 듣고 자라다 보면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라는 인식이 형성된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다.
원래라는 것은 정말 특별히 타고난 재능 말고는 그 어느것도 당연한 정답은 없다.
정답이 되는 정의도 없다.
그러니 ‘나’ 자신 스스로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아라. 정말 ‘내’가 맞는지.
당신의 생각의 흐름과 감정이 어쩌면 내가 알던 내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색안경
한국사회는 특히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세뇌라는 것을 당한다.
나는 그래서 한국사회의 세뇌식, 강압식 교육을 굉장히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유치원 시절부터 우리는 세뇌 당한 걸지도 모르겠다.
“여러분~ 동화 읽어줄게요~ 자~ 이제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될까요?”
“그쵸! 이렇게 행동 해야겠지요?”
“그렇죠! 이건 이렇게 해야 되는거예요!”
보라. 당연하게 가르침을 받은 우리는, 그것이 정답인 줄 안다.
과연 모든 것이 정답인가? 아닐껄? 그냥 교육 프로세스가 그렇게 정해져있는 ‘기준’일 뿐이니.
모두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예를 들어, 어르신이 지팡이를 집고 거동이 불편하신데, 버스에 자리가 없어 젊은이가 양보를 해야한다는 도덕과 예의를 우리는 배우며 자랐다.
근데, 어쩌면 그 어르신보다 내 몸 속알맹이 연령이 더 높고 더 몸이 병들어있거나 아프다면?
노약자.
젊은이도 약자일 수 있는데.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바라보는 시선들.
모두 알 것이다. 그것이 색안경이다.
어쩌면 내 몸둥아리보다 더 팔팔하신 어르신일 수도 있잖아?
물론 이건 극단적인 예시이긴 하지만, 나는 정말 그 어떤 어르신보다 아파봤기에 예시로 든 것이다.
왜 우리는 ‘꼭‘.
누군가가 지정해놓은지도 모르는 기준들에 어긋나면 사람을 나쁜사람, 미친사람, 잘못한 사람, 이상한 사람으로 판단을 할까?
속사정은 다를 수 있고, 보는 사람마다 기준이 달라 다르게 바라보여지기도 하고, 같은 책을 읽어도 깨달음의 의견도 제각각이다.
애초에 우리는 색안경을 끼는 사람으로 교육받으며 자라났기에 어쩔 수 없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서, 과연 지금 내가 끼고 있는 안경은 색안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 해보길 바란다.
나도 모르게, 거지가 노숙자가 더러운 차림새를 가지고 돈을 구걸하면 불쌍하거나 혹은 더러워 피하고 싶은가?
나도 모르게, 장애인을 보면 기피하거나 불쌍하게 동정하는가?
모든 것이 색안경일 뿐이다. 모든 것엔 당연함은 없고, 모든 것엔 정답은 없다.
패럴림픽에 나오는 장애우들을 보라.
나는 그 분들이 나의 살아온 인생보다 훨씬 훌륭하고 멋진 사람들이고, 강인한 사람들이라 공경하며 존경스럽다.
색안경 이젠, 우리 스스로 벗을 줄 알잖아?
누가 벗겨줘야만하는 젖먹이 아이가 아니지 않은가.
스스로 돌이켜 보자.
그들에게도 나 또한 타인이다.
프레임
색안경의 고착화는 프레임이다. 즉, 틀을 말한다.
우물 안 개구리.
자기만의 틀 안에서만 언제까지 스스로를 가두고 살 것인가.
언제까지 스스로 날지 못하는 새가 되어 새장을 잠글 것인가.
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는 더 없이 무궁무진하고 어쩌면 우주보다도 광대하다.
무엇이든 가능하고,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으며, 무엇이든 변화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당신이 상처가 많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지금 이 순간이 누군가가 마음에 안드는가?
착각.
그리고 망각.
나도 내가 가장 불행하고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를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였다.
그러나 나는 오랜 세월 끝에 깨달았다.
“왜.”
“왜 남에게 필요한 존재여야지만 살아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는가.”
내가 만들어낸 색안경이자, 틀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우물 안으로 집어 넣었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것이 내 인생이 아니며, 타인이 그런다고 날 알아주는 것도 아니며, 타인이 내 대신 인생을 살아줄 것도 아니다.
왜 타인에게 필요한 존재여야 하는가.
왜 그래야만 내 존재 가치가 살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는가.
이제는 깨달은 뒤의 나는 완벽하게 다르게 변화되었다.
나만의 인생이고, 나만의 속도이며, 나만의 때가 있고, 나만의 길이 있고, 나만의 가치관이 있으며, 나만의 존재는 스스로 살아 빛나는 별이다. 누가 쳐다봐주지 않아도 계속해서 묵묵히 제자리에서 빛나는 별과 같다.
그저, 내 소신껏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 틀에서 벗어나자.
과정에서 타인이 개입되었을 수는 있어도, 그 이후의 선택은 나 자신이기에.
나를 가두는 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