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만 캐러 갔을 뿐인데
시부모님은 은퇴와 동시에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 소일거리로 농사를 지으신다.
농사를 본업으로 삼은 건 아니지만, 집 앞 논과 밭을 공터로 둘 수는 없어 이것저것 심어 수확하시곤 했다.
감자, 고구마, 각종 채소와 과일들을 조금씩 수확하셨는데 생각보다 그럴듯하게 잘 자랐고 맛도 좋아 소소한 행복을 주었고 부모님도 수확의 즐거움을 느끼시는듯 했다.
그러던 어는 날, 이번에는 감자를 캐서 팔아보시겠다고 하셨다. 초록초록한 입들이 무성하던 여름이 시작될 무렵 이제는 감자를 캐야 할 시기라며 주말에 모이라는 호출이 왔다.
초여름 땡볕에 두 아들과 두 며느리, 네 명의 손주들은 선크림, 넓은 챙의 꽃무늬 농사꾼모자, 팔토시로 무장을 하고 밭으로 나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동서와 나는 서로의 모습을 보곤 씁쓸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새하얀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로 한눈에 봐도 도시 여자인 동서의 모습에서 농촌으로 시집온 해외이주 여성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밭으로 모이자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 저 앞에 보이는 밭이 전부 감자야. 다 같이 하면 금방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열명이 매달렸으니 금방 끝나겠구나 하며 자신 만만했다.
쪼그리고 앉아 감자를 캐기 시작하니 맨질맨질한 감자가 캐도 캐도 계속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도가 나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한시 간이상 걸린 듯한데, 이제 겨우 한 줄 캤다.
" 어유.. 한 줄 캐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리다니, 남은 게 여섯 줄인가요?
와.. 그럼 앞으로 6시간은 더 걸리겠네요?"
이제 한 줄 캐고 두 번째 줄로 이동하느라 허리 한번 겨우 핀 내가 볼맨소리를 하자 아버님이 이어 말씀하셨다.
" 힘든 일을 할때는 멀리 내다 보면 못 해. 농사 일 할 때도 마찬가지야 바로 앞에 있는 것만 보고 하다보면 어느새 끝나는거야"
아버님도 참.. 며느리 힘들지? 고생한다~ 허리좀 폈다 해라, 공감은 못해줄 망정 힘들게 일하는 며느리에게 바른소리로 핀잔을 준다.
'금방은 무슨 금방이야 하루 종일 해야 하게 생겼는데..' 이렇게 일을 벌이신 아버님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쪼그리고 앉아 서너 시간이 흘렀을까 이걸 매년 해야 한다니 매년 감자를 캘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입에서 휴지를 줄줄이 뽑아내는 마술사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끝도 없이 따라 나왔다.
' 아이쿠야, 내가 팔자에 없던 농사를 지고 있구나.. 이제 매년 여름마다는 감자를 캐야 하는 거겠구나. 가을 무렵에는 고구마를 캐야 되겠지?'
' 며느리란 존재는 이런 것인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부르면 와서 일을 해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던가.'
' 내년에는 농사일에서 살짝 빠져보고 싶은데, 어떤 수를 써야하나? 그렇다고 나만 빠질 수는 없지. 동서랑 나랑 어머님까지 여자 셋이 한 배를 탔으니. 그나저나 여자 셋이 빠지면 남자 셋이서 이 많은걸 다 해야 하는 건데.. 아휴, 나는 하기 싫고 그렇다고 다른 식구들이 다 하라고 그냥 둘 수도 없고..'
못하겠다고 박차고 나갈 용기도 없으면서 끝없이 딸려 나오는 감자처럼 답을 내릴 수 없는 물음도 줄줄이 반복되었다.
육체노동의 장점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일만 하면 된다는 것이라 들었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몸은 몸대로 힘들고 마음은 그 이상으로 더 고달파졌다.
그날 이후 시댁에서는 더 이상 대량의 농사는 짓지 않으신다. 몇 차례 감자와 고구마로 수입을 얻어보겠다고 팔아도 보셨지만 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날처럼 10명이 하루 종일 고생스럽게 감자를 캐도 손에 쥐는 돈은 몇 푼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알게 되신 것이다. (그 해에 감자가 풍년이라 박스당 5천 원 정도 받은 걸로 기억한다. 40박스를 팔아봐야 20만 원인 셈이다)
인건비가 나오지 않는 건 물론이거니와 일하느라 고생한 아들, 손주들에게 고생했다고 몸 보신 겸 고기라도 사 먹이려면 그 비용이 하루 일당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귀농을 시작하시고 몇 해는 때마다 도와달라 요청하셨다면 수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이제는 벼농사 시기를 제외하곤 좀처럼 농사일로 호출하는 일이 줄었다.
벼농사 시기에도 오로지 아들들만 가면 되는 구조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흘러 몇 해 전 농사일은 이젠 추억거리가 되었다.
감자 캐던 날, 쪼그리고 앉아 감자를 나르며 오지도 않을 미래의 일을 염려하느라 마음까지 지옥으로 만들었던 하루의 기억이 선명하다.
감자를 캐며 함께 고생했던 가족들에게 말과 태도로 불평과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했는지 지금 되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부끄러우면 어쩌랴.. 그게 그때의 나의 본모습인 것을.
아버님이 툭 던지신 " 농사 일 할 때는 바로 앞의 일만 보고 하는 거야"라는 말은 내 삶에 꽤나 영향력이 있는 말이 되었다. 20대의 고민 '무얼 하며 먹고 살 것인가' '어떤 꿈을 갖고 살 것인가' 에 몰두 했던 시절이 떠오른다. 손으로는 좀처럼 뽑히지 않던 여리고 짧은 흰 머리카락 처럼 답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나에게도 아버님이 던지신 말을 전하고 싶다. 그냥 오늘을 살으라고.
혹시 나는 오늘도 장차 올지 오지 않을지 모를 미래의 염려를 끌어다가 미리 걱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소중한 하루를 어떤 생각으로 채우고 있는지 오늘도 내 마음 구석구석을 들춰보려 한다.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 더 작게는, 지금 이 순간을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감자밭에서 얻은 삶의 지혜였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도다.
(마태복음 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