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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보통의 삶

그땐 내가 미안했다고

듣고 싶은 말

by 쉴만한 물가

<다섯째 딸, 글을 퇴고해 다시 올립니다>


육 남매 하면 누구에게나 척하고 떠오르는 구성. 남아선호사상이 강했던 시절 장남인 아빠는 대를 이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안고 태어났다. 게다가 결혼하고 바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합가해 살았으니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거였다.

'이것이 운명의 장난인가?' 대를 잇기 위해 아들만 기다리던 부모님에게 토끼 같은 첫째 딸, 야무진 둘째 딸,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에 이어 넷째도 다섯째도 딸이 당첨이다. 딸만 줄줄이 낳고 어른들 볼 면목이 없던 엄마는 출산하고 3일 만에 부엌으로, 일터로 복귀했다고 한다. 사막에서 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근 10년을 임산과 출산을 반복하던 엄마에게 드디어 여섯째로 아들이 찾아왔다. 딸 다섯에 기어이 막내아들은 본 찐 육 남매 스토리는 80년대생 나의 이야기다. 영문도 모르고 태어나보니 다섯째 딸이 된 나의 이야기.


가장 아픈 손가락이 누구냐는 질문에 우리 엄마는 두 번도 생각 않고 막내딸이라고 답한다는 얘기를 친구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 어릴 때부터 있는 듯 없는 듯 소란 한번 피우지 않았고 손이 간 적 없이 혼자 알아서 컸기에 안쓰럽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이십 대에는 '그렇지, 원체 순한 기질에다 사춘기도 특별할 것 없이 지나갔고 언니들처럼 틈만 나면 자매끼리 결투를 벌인 것도 아니었으니 엄마가 그렇게 느끼실 만도 하지' 싶었다.

결혼과 동시에 출산과 양육으로 정신없이 살던 시절 그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확한 정황은 기억에 나지 않지만 언니들도 나도 출가한 뒤였으니 어떤 행사로 우리는 오랜만에 친정집에 두런두런 모였었다. 형제가 많으니 모이기만 하면 옛날얘기로 떠들썩했다.

"그거 기억나? 셋째는 진짜 어릴 때 못난이였는데, 지금은 용 됐다, 용."

"막내가 여자들 틈에서 자라서 어릴 땐 여리여리 했잖아~ 동네 애들이랑 놀다가 맞고 들어오면 막내 때린 애 누구냐며 큰 언니가 쫓아 나갔었잖아! 그때 언니들이 대단했지"

"둘째는 국민학교 1학년때 받아쓰기 시험을 보고선 동네 떠들썩하게, 엄마~ 나 빵점 맞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하교했었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엄마도 거들었다.

우리는 서로의 어릴 적 흑역사들을 추억하며 그 시절로 돌아갔다.

셋째 언니가 말했다. "그거 기억나? 엄마 아빠 일하러 간 사이에 할머니가 다섯째 얘를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대전 먼 친척네 집에 보냈잖아, 그 집에 애가 없다고 "

"어! 기억나. 엄마 아빠가 퇴근하고 밤늦게 집에 와서는 막내를 다른 집에 줘버렸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밤중에 대전에 가서 얘를 데리고 왔잖아 " 다른 언니도 한마디 보탰다.

30년 만에 처음 듣는 얘기였다. 분명 언니들끼리는 다 알고 있는 얘기였을텐데 나를 배려해서였는지 대수롭지 않은 오래된 일이라 그랬는지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말들이었다.

나의 출생 스토리는 쏟아지는 과거의 이야기들과 함께 왁자지껄 그 자리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지만 나의 시간은 그 이야기를 듣던 순간에 멈춰버렸다. 모든 소리는 음소거되었고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나만 남겨진 것 같았다. 출산한 지 얼마 안 돼 갓난아이를 키우던 서른 살의 나를 ‘ 넌 버려진 아이야'라는 연민이 슬그머니 다가와 삼켜버렸다.


맞벌이를 하는 엄마를 대신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시던 할머니와 나는 좀 각별한 사이였다.

줄곧 시장에 따라다니며 장본 짐을 들어드렸고 채소를 다듬을 때면 옆에 앉아 같이 도와드리는 유일한 손녀였다. 다리가 약해 걸음이 편치 않으실 때에는 채소나 과일을 사 오는 전통시장 심부름을 하루가 멀다 하고 다녔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귀가 가려워 못살겠다는 할머니의 귀를 매일같이 시원하게 파드리는 역할도 내 몫이었다. 나는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했고 할머니도 '네가 아니면 누가 날 도와주냐'는 말로 막내 손녀의 자리를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할머니를 도와주는 손녀라도 귀한 아들 손주를 따라갈 순 없었다. 딸들과 막내 남동생을 대놓고 차별하는 일은 대수롭지도 않을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례로는 가을철에 통통한 햇밤을 삶아도 우리는 스스로 반을 갈라 티스푼으로 파먹어야 했고 남동생에게는 한 톨 한 톨 예쁘게 깎은 밤을 글라스락에 담아 건네주셨다. 고기반찬이나 생선은 늘 동생 앞에 자리했고 맛있는 반찬 좀 먹어볼 요량으로 팔을 길게 뻗다 할머니랑 눈이라도 마주칠 때면 할머니는 쓰윽 눈을 흘겨 이내 젓가락의 방향을 김치로 돌려야 했다.

소소한 작은 것에서부터 드러내놓고 차별을 하셨기에 평소엔 그러려니 했지만 가끔은 너무 속이 상해 남몰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허나 쪽수가 유리해서였을까, 다섯 명 자매들의 사이는 동지애인지 유대감인지 모를 끈끈함으로 날로 견고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할머니를 따르던 나였는데 갓난아이였을 때 할머니의 손에 버려졌다는 이야기는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아이를 낳고 육아에 시달려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할 시기에 듣게 된 소식이라 나를 더 힘들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그즈음 아흔이 넘은 할머니는 노환으로 귀가 안 좋으셨다. 손짓 발짓을 해가며 크게 소리를 질러야 짧은 단어를 겨우 알아들으셨으니 꼭 필요한 말 이외의 대화는 시도하기 어려웠다. 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간은 할머니를 볼 자신이 없어 친정에 자주 찾아가지 못했다. 존재를 부정당했다는 감정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리고 몇 개월 지나 할머니와 영원한 이별을 해야 했다.


일상으로 돌아와 자녀를 양육할 때면 자주 궁금해졌다.

주방 서랍장을 호시탐탐 노리던 돌쟁이 딸은 틈만 나면 서랍장을 열었고 그 안에 든 게 무엇인지 확인하겠며 쏟아냈다. 언젠가는 주방 바닥에 쏟아놓은 참기름을 몇 날 며칠을 닦아야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란 이런 것이겠지, 그런데 어린 나는 어째서 그렇게 얌전할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을 만지며 어지르는 딸을 볼 때면 아무것도 만지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던 어린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끝없는 질문을 쏟아내던 아이를 볼 때는 말없이 수많은 이야기를 눈빛에 담고 있는 나를 만났다.

'얌전히 살아야 이 집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어서였을까? 아기 때 버려진 기억을 무의식으로 기억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호기심’이란 것을 가져본 적 없던 유년시절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내 아이만 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 되었다. '아가야, 표현할 길이 없어 힘들었지?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품고 있었니? ' 유년시절의 어린 나를 만나 안아주고 토닥이는 시간이 되었다.


조용히 주변을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작은 나는 타인의 감정을 잘 살피고 상황 파악을 잘하는 어른으로 성장했다. 아픈 과거의 일들은 깊이 마디마디 새겨져 나를 단단하게 키워냈다. 하지만 끝내 할머니와 나누지 못한 이야기는 마음속 가장 깊은 곳 한편에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하는 일에 마음을 맡겨두었더니 다행히도 할머니에 대한 원망은 작아졌고 그리움과 이해가 찾아왔다.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만나는 날, 할머니와 얼싸안고 원 없이 옛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할머니는 그때 어린 나를 왜 남에게 주었냐고. 그 일을 알고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느냐고. 내가 없었으면 할머니 귀는 누가 파주고 할머니 이야기는 누가 들어주느냐고.


할머니에게 듣고 싶다.

그날 엄마 아빠가 너를 다시 데려와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살면서는 그날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다섯째 네가 있어서 내가 심심치 않게 살았다고 그땐 내가 미안했다고.


image-8693209_1280.png 할머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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