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줄 놀이
유년시절에 내 손에는 검정 고무줄이 들려있곤 했다.
어릴 때부터 똑똑했던 것도 아니었고 조용하고 얌전한 편이었다. 존재감을 드러낼 만한 재주도 없어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지만 고무줄놀이를 할 때만큼은 달랐다. 그것에서 만큼은 친구들과 당당하게 견줘볼 만한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고무줄놀이는 아랫도리 입을 것에 들어가는 기다란 검정 고무줄을 두 사람이 다리에 걸쳐 잡아당기고, 나머지 한 명이 정해진 동작을 하며 고무줄을 뛰어넘는 놀이다. 노래에 맞춰했었는데 발로 밟아 0단계부터 시작한 고무줄을 발목, 무릎 등 점점 더 높은 위치로 올리며 난이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초등학교 시절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틈만 나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고무줄놀이를 했다.
“ 장난감 기차가 칙칙 떠나간다~ 과자와 사탕을 싣고서~ 엄마방에 있는 우리 아기한테 갖다 주러 갑니다~ ” 고무줄과 내가 하나 되어 무아지경으로 빠져 들 때 즈음엔 어김없이 개구쟁이 남학생들이 등장했다. 고무줄을 잡아 튕겨 아프게 하거나 심하게는 끊어놓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그 아이들을 혼내주겠다는 일념으로 녀석들을 잡으러 뛰어다녔고 고무줄놀이는 잡기놀이로 끝이날 때가 있었다. 당시에는 한창 놀만 하면 훼방을 놓는 남자아이들의 만행을 이해할 수 없는 못된 짓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고무줄놀이에 스릴을 더해준 묘미였던 것 같다.
1단부터 시작해 10단 이상 넘어가야 끝이 나는 이 놀이는 동네마다 규칙이 조금씩 달랐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12단계가 마지막 단계였다. 12단계를 먼저 끝낸 사람은 승리의 만세를 불렀고 하루 종일 대장 노릇을 할 수 있는 특권도 주어졌다.
나는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세상을 배웠다. 이 놀이는 발목부터 시작해 무릎, 허리, 가슴, 한고비 한고비 그냥 넘어가는 법 없이 통과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한 단계를 무사히 마쳤을 땐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이내 다음 단계라는 조금 더 어려운 문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라는 생각을 안 해본 이는 없을 것이다. 등굣길 운동장 옆 도보를 지나갈 때면 축구공이 날아와 수십 개의 까만 동그라미 중 내 머리를 맞췄고, 확률이 아주 희박하다는 새똥을 맞아 '오늘은 또 얼마나 좋은 일이 생기려고 이러나' 하고 애써 웃어넘긴 적도 있었다. 이처럼 사소한 일조차도 나는 피해 갈 재주가 없었고 때로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워 사는 내내 그 일들에 시달려야 하기도 했다. 일주일에 세 번이나 변태를 만나 '나에게 문제가 있나' 하고 괴로워하던 그 시절. 내 사정을 알게 된 남동생이 호신용 가스 스프레이를 사서 내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고 다섯 살 때 엄마의 교통사고를 눈앞에서 목격해 동네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두려움에 떨며 견뎌야 했다. 이렇듯 우리네 삶에는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고무줄놀이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통과하기 어려워지듯 삶에서 만나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일도 꽤나 어려웠다.
허나 언젠부턴가 내 손에는 더 이상 검정 고무줄이 들려있지 않게 되었다.
그 손에는 무거운 전공 서적이, MCM 토트백이, 아이폰이 들려 있곤 했다. 대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월 5천 원부터 시작해 어려운 이웃의 손을 지금 까지 잡고 있으며, 아이들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이 좋아 교회 유년부 아이들의 손을 잡았던 때도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계란판, 비닐 봉다리, 약국 봉투나 택배 박스를 들고 있을 때가 더 많았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자녀들의 입시라는 숙제를 꼭 쥐고 있다. 첫째는 일반 고등학교에 갈걸 알았기에 비교적 성적에 덜 휘둘리며 중학교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시험에서 나쁜 성적도 받아봐야 그 무게를 견디던 동력 삼아 열심을 내던 아이에게 동기부여가 될 거라 믿었고 그땐 내가 꽤 쿨한 엄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나니 마음이 급해졌다. 지금부터의 모든 성적이 입시와 직결된다고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다. 결국엔 나도 입시 앞에 벌벌 떠는 K엄마였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삶에서 자녀의 입시는 가슴에서 어깨로 넘어가는 6단계 정도의 시험일뿐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까치발 들고 팔을 쭉 펴 올린 마지막 12단계 같은 어려움도 만날 테지.
12단계까지 잘 뛰어넘으면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넉넉한 마음과 성숙의 기쁨도 찾아오겠지.
<이 글은 나희덕의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를 읽고 재해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