튤립은 제일 좋아하는 꽃 중에 하나이다. 생김새만 보아도 그렇다. 곧게 뻗은 줄기에 단순하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을 이룬 꽃잎은 우아함을 풍긴다. 그런데 이렇게 곱고 우아한 녀석이 다양한 색으로 무리 지어 동글동글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 귀엽기도 하다. 깔깔대는 꼬마들 보듯 절로 웃음을 짓게 된다.
튤립 너.. 참 이중적인 매력이 있구나.
그래서인지 튤립은 한가득 꽃다발로도 한 송이 꽃으로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인지라 항상 아이들 졸업식 꽃다발로 픽했던 튤립.
따뜻하면 봉오리를 활짝 여는지라 좀 더 오래 보겠다고 베란다와 거실을 분주히 오갔다.
첫 아이의 초등학교 졸업 의미를 부여하고자(?) 그림으로도 남겨두고 싶었나 보다.
튤립 하면 떠오르는 네덜란드.
찬란했던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튤립 열풍에 담긴 'broken tulip'을 소개할까 한다.
튤립의 뿌리는 네덜란드가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텐산산맥인 것으로 알려졌다. 오스만제국이 세력을 확장시키는 과정에 튤립에 매료되었고 몇 종의 튤립을 재배하여 다양한 품종으로 개량시킨다. 튤립이 핀 모양이 무슬림이 머리에 두르는 터번을 닮아 터키 사람들 사이에서는 튈벤드(tülbent)로 불리기도 하였다. 16세기 상인에 의해 유럽 각지에 전해지면서 라틴어 및 프랑스어를 거쳐 튤립(tulip)이라는 영어이름을 갖게 된다. 튤립은 네덜란드와 터키 두 국가 모두 국화로 지정된다.
네덜란드 1610년대, 여유 있는 식물 애호가들은 튤립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특히 이들이 열광한 품종은 역설적이게도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화려하게 피어난 꽃_흰 꽃잎에 붉은 줄무늬를 가진 셈페르 아우구스투스(Semper Augustus/영원한 황제)였다. 단색의 튤립은 저렴하게 거래가 되었고, 아름다운 튤립은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 가격도 점점 상승한다.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작자미상
1964년 무렵 이런 튤립의 인기에 힘입어 투기자들은 수익성 좋은 투자 기회로 생각하고 가격 상승을 목적으로 시장에 진입한다. 구근 하나의 가격은 현재 시세로 따지면 2억 쯤? 양파 같은 뿌리 하나로 집을 바꾸었다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니 영주뿐만이 아니라 장인과 농인 모두 생업은 제쳐두고 알뿌리 투기에 참여한다.
실제 피어있는 꽃이 아니라 땅속에 묻혀 있는 구근의 거래이기에 시장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내년에 피어날 꽃_ 어떤 모양의 색깔이 피어날 예정이라는 것을 기록한 약속어음이 발행된다. 네덜란드 국민들 모두가 튤립시장에 뛰어드니 수요가 팽창하여 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지만 본래 구매자였던 식물 애호가들이 이런 높은 가격에 구입할리가 없다.
1634년~1637년 튤립시세
1937년 2월 3일 이후로 아무도 튤립을 구매하지 않는다. 튤립의 가격 폭락, 시장의 붕괴.
혼란 속에 빠진 채권자와 채무자의 분쟁은 소송으로 이어졌으나 채무자는 이행능력이 없다. 정부에 지원을 호소해도 별 다른 방안이 없다. 의회와 시당국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튤립거래는 보류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는 채권자와 채무자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한 도시에서 3.5%의 위약금을 지불하고 채권채무를 정리하라고 기준을 정하고 다른 지역들도 이를 많이 따랐다고 한다.
이렇게 튤립버블은 끝났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broken tulip'은 그 당시 네덜란드 정물화에 많이 담겨있다. 단색의 튤립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Ambrosius Bosschaert the Elder, Still Life Of Four Tulips In A Wan-Li Porcelain Vase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는 꽃 정물화를 전문으로 하는 최초의 예술가 중 한 명이다. 튤립과 장미를 포함하여 다양한 꽃들이 담겨있는 화려한 작품도 많지만 서로 다른 네 송이의 튤립이 명나라 화병에 담긴 작품을 가져와 본다. 조가비는 바다, 생명, 잔해와 관계가 있어 삶과 죽음을 의미한다.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는 훌륭한 스승으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기도 하고 꽃이나 과일 등의 정물화를 다룬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된다. 당시 네덜란드 미술 시장의 호황과 더불어 이국적인 꽃에 대한 광적인 집착 덕분에 꽃 정물화가 많은 건 우연이 아니겠다.
Balthasar van der Ast, 튤립 한 송이가 있는 꽃병
셈페르 아우구스투스 한 송이가 담긴 작은 꽃병.
당시에는 붉은 줄무늬가 바이러스 때문인 것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구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튤립이 나올 줄 알았겠는가?
두 마리의 곤충, 파리와 나비가 있다. 파리는 죽음과 부패를 나타내고 나비는 재생과 환생을 상징한다. 파리는 튤립이 어쩔 수 없이 시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만, 나비는 매년 구근에서 새로운 튤립이 피어나는 환생을 보여주나 보다.
암브로시우스 보스샤르트의 제자이자 처남인 발타사르 반 데르 아스트의 작품이다.
Hans Gillisz. Bollongier , 꽃 정물화
그 유명한 튤립_셈페르 아우구스투스, 아네모네, 장미, 카네이션을 함께 그렸다. 그러나 계절적으로 함께 개화를 하는 꽃들도 아니고 공중에 있는 것처럼 위로 빼곡하게 채울 수도 없다. 하단의 꽃들은 점점 시들어서 얼굴을 숙이고 있다. 테이블 위의 도마뱀은 기만, 애벌레는 탐욕, 달팽이는 원죄를 상징한다.
블롱기에르는 1637년 튤립열풍이 꺼지고 난 뒤에 작품을 완성했다. 당시 일반 서민들까지 무리하게 튤립 구근을 투기하여 애써 모은 재산을 순식간에 잃기도 했다. 화려하게 솟아있는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는 곧 시들 수도 있으니 세속적인 것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