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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라해 Nov 10. 2024

은행냄새

그냥 글이 써졌어




슬픔을 마주해야만 했던 여름. 지독하게 덥고, 지독하게 길고, 지독하게 아팠던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여름은 슬픔을 마주해야 했던 날씨임을 인정했기에 최선을 다해 슬픔을 마주했다. 그리고, 찾아온 가을은 찾아왔던 슬픔을 지나간 여름에 두고 다시 내 삶에 집중하는 시기다. 너와 함께 보낸 계절은 한 계절 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잔상이 길고 굵게 남았을까. 잔상을 지우기 위해, 다시 혼자임을 인정하기 위해 다시 혼자 걷기를 시작한다. 날씨가 이제는 조금 쌀쌀해져서 저녁에는 긴팔을 입고 걸어야겠더라. 그렇게 혼자 걷는 도중 내 옆을 지나간 어떤 사람에게 네가 뿌리는 향수와 비슷한 향기가 났다. 그 향기는 어디를 가지 않고, 오랜만에 내 코와 인사를 했다. 다행히 그곳에는 은행나무가 있었다. 은행만의 고약한 냄새가 오늘은 나를 위로해준다. 아직은 비슷한 향기만으로도 뒤돌아 볼 정도로 쓰라린 시기에 은행이 나를 위로해 준다.


가을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걷던 거리가은행나무가 많은 거리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은 슬픔을 다시 마주할 용기가 없어. 그러니, 내가 조금이라도 슬퍼 보인다면 은행이 고약한 자신의 냄새로 나를 위로해 줬듯이, 나와 함께 있음을 내가 느낄 수 있도록 인기척을 나에게 뿜어줘라. 그러면, 뛰는 심장에 긴 호흡을 주면서 다시 평온해져 볼게.


계절이 다시 나를 위로해 준다. 가을이 여름은 지나갔다고 나를 안아줬다. 그렇게 모든 시간과 경험이 다시 나를 위로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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