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글이 써졌어
옛날에는 글 하나를 쓰기 위해 노래를 듣고, 책을 읽고, 산책을 했는데 요즘에는 그냥 글이 써지더라. 글을 쓰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중요했는데 지금은 그냥 써져. 왜 써지는지 그게 더 궁금한 요즘이네. 글은 평생토록 눈으로 보지 못하는 감정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는데, 감정이 요동치지도 않아. 이제야 글을 쓰는 게 익숙해진 걸까. 세 권의 책을 내고, 500편 이상 글을 쓰니 이제야 몸도 익숙해진 거니. 참, 글이라는 놈 밉다. 세 권의 책과 500편의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힘들어했을지 너는 알고 있니. 오로지 내 방에 앉아 글을 남기기 위해 외로워했던 내 마음은 알고 있니. 상처받았어도 더 좋은 내가 되고 싶어 상처를 다시 직면하면서 글을 썼던 내 마음은 알고 있니. 이제야 느껴진다. 글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말이야.
내려도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는 내 아이폰 속 메모장. 이곳에 남아있는 감정들은 누가 위로해야 할까. 군 복무 중 모두가 자는 새벽에 근무서면서 보이지 않는데, 비상통로 불빛으로 간신히 글자 모양새를 보면서 써 내려간 수첩 여섯 권. 이곳에 남아있는 감정들은 누가 위로해야 할까. 그렇게까지 남기려고 했던 이유는 뭘까. 가던 길 잠시 멈춰 문장이나 단어 하나 메모장에 남기고, 선임들 간부들 눈치 보면서 써 내려간 수첩에는 무슨 이유가 있길래, 왜 남겼는지 메모장의 끝과 수첩의 처음 시작 장에는 쓰여있을까.
이런 외로움에 익숙해진 걸 수도 있겠다. 글을 남기기 위해 내 안에 있는 어두운 감정 동굴에 들어가는 게 이제는 익숙해진 걸 수도 있겠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게 무서웠던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게 익숙해진 거다. 동굴 속 내 옆에 아무도 없는 게 익숙해진 거다. 나는 그렇게 글이 써지는 게 익숙해진 거다. 나를 알기 위해 어두운 동굴을 들어가는 게 도전이었던 내가 이제는 동굴을 들어가는 행위가 익숙해진 거다. 고치고 싶지 않다. 그런 이유도 없다. 글은 써지고, 그렇게 또 글이 남는다. 이게 내 모습임을 인정한 게 조금 됐을 수도 있겠다. 적당한 외로움, 정당한 혼자임을 인정하는 거. 이제야 익숙해진 거다. 어느 정도 글을 쓰는 행위가 익숙해지니깐 이제야 스스로를 인정한 거다. 내 안에 있는 어두운 동굴이 있어도 괜찮다는 걸, 혼자일 때 외로울 때를 인정하는걸. 스스로를 사랑하는 방법이 이렇게 글을 남기는 거라는 걸. 정말 이제야 몸으로 느끼고 이해했다는 증거다. 참 오래 걸렸네, 그렇다고 변하는 건 없을 거야. 지금처럼 글을 남기고 책으로 남기고 사진으로 남기며 변함없이 그렇게 나를 남길 테니. 알겠으니 빨리 끝내고, 흑백 요리사나 보자. 다행히 나는 이 세상에 내 모습대로 생존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