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또는 나에게
“다녀오겠습니다!”
눈 뜬 지 10분 만에 등교 준비를 마치고
종종 걸음으로 현관문을 나서는 큰 아이.
푹 눌러쓴 모자부터 가방에 바지까지,
추구미가 '그림자'인 건가 싶게 새카맣다.
그러나 잘 보면 곳곳에서
그녀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취향을 발견할 수 있다.
긴 검정 바지 밑단 끝에 살짝 보이는
여리여리 딸기우윳빛 크록스
커다랗고 시커먼 배낭 가득 매달려 달랑 거리는 키링들.
핑크핑크하고 귀욤귀욤 한 것을 여전히 애정해 마지않는 열여덟, 자칭 '수능 끝났으니 사실상 이제 고 3'인 그녀의 변치 않는 취향이다.
아이가 몸만 빠져나간 방문을 살짝 열어본다.
그곳엔 방금 전까지 머물렀던 아이의 미지근한 체온과 함께 온갖 분홍빛 취향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복슬복슬 핑크 후리스, 깜찍한 캐릭터가 그려진 핑크 잠옷,
초등 때부터 한결같이 애정하는 마이멜로디,
최근 제대로 빠져있는 고리락쿠마 컬렉션,
애정하는 아이돌을 쏙 빼닮은 각종 토끼 인형들까지.
하필 좋아하는 아이돌을 모에화 한 인형까지도 그녀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핑크 토끼다.
역시 최애와 나는 운명이라며 눈을 반짝이던 아이는 베개, 인형, 키링, 쿠션 같은 핑크 아이템들을 살뜰하게도 모아 방안 곳곳에 진열해 두었다.
큰 딸은 어릴 때부터 취향이 뚜렷했다.
연한 핑크색 아이템, 작고 하얗고 귀여운 동물 캐릭터, 아기자기한 피규어…. 그녀의 취향에 딱 들어맞는 컬렉션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수집했다.
유치원 때부터 하나, 둘 모아 지금은 수십 개가 넘는 소니앤젤 인형들은 고등학생인 지금까지도 그녀 방 책장 위 메인 코너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취향이 뚜렷한 만큼 고집도 셌다.
한 번 하고자 하는 것은 끝까지 하겠다고 우겼고,
반면 하기 싫은 일은 절대로 안 하려고 버티고 또 버텼다.
딸 엄마의 로망인 '발레복 입히고 토슈즈 신기기'를 해보고 싶었던 걸까? 초보 엄마였던 나는 네 살짜리 딸을 위해 (어쩌면 내 만족을 위해) 문화센터 발레 클래스를 등록했었다.
딸 취향에 딱 맞는 연 핑크 튜튜가 돋보이는 샤랄라한 발레복과 토슈즈를 갖추고 설레며 찾아간 문화센터.
그러나 첫날,
문화센터 교실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유독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던 아이는
처음 보는 공간에 선뜻 들어가지 못했고,
겨우 설득해 들어간 교실에서는 아무것도 따라 하지 않고
내내 내 무릎 위에만 앉아 있었다.
몇 주 동안 같은 패턴이 반복되다가
마침내 아이가 내 무릎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서던 날!
이제 드디어 깜찍한 꼬마 발레리나의 율동을 볼 수 있으려나 한껏 부풀었던 내 마음은 그러나 그저 또 다른 욕심일 뿐이었다. 아이는 다른 친구들처럼 선생님의 율동을 따라 하는 대신
음악을 느끼며 자신만의 춤을 추기 시작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 핑크 발레 공주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으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아이의 나 홀로 발레 수업은 그 후로도 오래 계속되었다.
율동은 따라 하지 않지만 아이가 충분히 즐거워 보였고, 수업 분위기를 망치거나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나는 꿋꿋하게 개성 강한 핑크 공주의 발레 수업을 이어나갔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과연 아이의 고집이었던 건지 나의 고집이었던 건지 사실 조금 헷갈린다.
취향도 고집도 강한 딸 아이이건만,
어쩐 일인지 체력은 그 강인함의 반의 반도 따라가질 못한다.
고 2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몇 주를 내리 무리하더니 결국 시험을 일주일 앞둔 지금 단단히 탈이 나고 말았다.
열이 펄펄 나고, 몸살로 끙끙 앓으며 누워있는 아이의 얼굴과 입술이 발갛다. 어려서도 자주 열이 나고, 아팠던 아이였던지라 약을 먹고 겨우 잠든 얼굴에 어린 시절 열에 들떠 잠든 모습이 겹친다.
내년이면 아이는 진짜 고3이 되어 본격적인 대입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힘들어도 흔들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1년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좋아하는 예쁜 것, 귀여운 것들은 잠시 뒤로하고 우중충한 독서실과 참고서 더미 속에서 버텨내야 할 시간이 될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아이의 마음까지도 온통 까맣게 칠해져 버리는 건 아닐까 사실 나는 두렵다.
엄마가 흔들리면 안되기에 덤덤하고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아이 곁에 있어주려 애쓰고 있지만, 나 또한 먹구름 처럼 몰려오는 이런저런 생각과 걱정 속에 가슴이 답답하고 막막해질 때가 많다. 무던히 지내다가도 때로 폭풍처럼 몰려오던 불안함과 두려움에 흔들렸던 나의 고3 시절. 아이는 내가 아님에도 자꾸만 그때의 내 마음에 아이를 미리 대입시키곤 한다.
바라건데,
내가 아이의 핑크 엄마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 작은 위로와 포근함이 되어줄 수 있는. 따뜻한 집밥 한 끼, 꼭 안아주는 엄마 품 같은 것들로.
그리고 그녀가 어둡고 까만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그녀만의 핑크빛 즐거움들을 놓치지 않고 꼭 붙들었으면 좋겠다. 보들보들한 핑크 잠옷과 앙증맞은 토끼 인형들, 좋아하는 아이돌의 예쁜 미소... 그녀의 변치않는 취향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그녀를 그녀답게 지켜주는 힘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약 잘 먹고, 오늘 하루 더 푹 쉬고
내일은 훌훌 털고 일어나 웃으며 등교할 수 있길.
좋아하는 핑크색 크록스를 신고,
너답게, 힘차게.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조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두려움 앞에서 하늘을 보아요
외로운 그대여 걱정 마요
꿈꾸는 그 길을 또 걷고 걸어요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동영상: 유튜브 / 노래하는 나나
*표지 이미지: 핀테레스트 / 핑크색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