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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의 날씨에도 야외를 뛰어야 하는 이유

<길 위의 뇌> 정세희 교수님을 만나다

by 햇살 드는 방
추위 속을 달리는 이는 촛불 같기도, 거울 같기도 하다. 이파리가 다 떨어진 나무와 얼어버린 물줄기, 무수하게 흔들리는 마른 갈대, 채도가 잔뜩 낮아진 풍경 사이를 말없이 달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날카롭고 외롭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정수에 다가서는 것처럼 보인다.

<길 위의 뇌>, 정세희, 한스미디어


뜨거운 여름 시작한 달리기가 가을을 지나 겨울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춥고 미끄럽다는 겨울 달리기에 미리 겁부터 먹고 헬스장부터 등록했지만, 여전히 트레드밀보다는 탁 트인 야외에서 달리는 시간이 더 많고, 즐겁습니다. 지난주까지는 분명 그랬습니다. 문제는 이번 주부터 날씨가 급격히 추워졌다는 겁니다. 전생에 곰이었는지, 저는 겨울만 되면 유난히 집 밖에 나가기 싫어집니다. 가족들이 떨구고 나간 온기와 체취가 폭닥하게 배어있는 따뜻한 집 동굴에 나 홀로 몸을 숨기고 하염없이 게을러지고 싶은 겨울의 나날. 그러나 올겨울은 곰이 아닌 달리는 사람으로 살아보고자 마음먹었기에, 겨울잠의 유혹을 이불 털 듯 털어내고 쨍하게 차가운 현관문 밖 세상을 향해 용감히 발을 내딛어야만 합니다. 운동화끈 질끈 묶고, 두 눈도 질끈 감고.


그러나 현실은…. 이불속에서 핸드폰을 쥐고 누워 겨울잠 자듯 종일 뒹굴거리고만 싶은 요즘. 겨울의 시작, 살을 에이듯 날카롭게 불어올 칼바람과 귓불이 떨어져 나갈 듯 차가운 영하의 날씨가 본격적으로 찾아왔습니다. ‘달리는 사람’으로서 처음 맞이한 혹한의 계절. 과연 런린이는 혹독한 겨울 추위에 맞서 계속 달릴 수 있을까요?




아직 가을이 한창이던 11월의 어느 날,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강의실에서 정세희 교수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참여하게 된 달리기 행사 <온코런>에서 뛰기 전 사전행사로 마련해 준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정세희 교수님은 ‘달리는 의사‘라는 멋진 별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공의 시절 우연히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같이 달리고 계시기 때문이죠.

강의 하시던 날도 어김없이 달리고 오셨다는 교수님과 함께

교수님은 ‘우리가 달려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시작하시기 전 혹시 달리기를 하고 계신 분이 있는지 물으셨고, 강의실에 앉은 이들의 절반 이상이 손을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달려야 할 이유를 너무 잘 알고 계시겠네요. 그런 분들 앞에서 이런 주제로 말씀드려야 해서 어쩌죠? “

많은 분들이 이미 달리고 계시다는 이야기에 조금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강의를 시작하셨지만 달리기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분들이 많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하신 듯 했습니다. 강의를 통해 “하루에 5분이라도 달리는 것이 달리지 않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라는 것을 여러 과학적•의학적 근거들을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달리기가 암 예방과 재발을 막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달리지 않고 걷기만 하면 우리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왜 좋은 음식보다 좋은 운동을 찾아서 챙겨야 하는지…. 여러 이야기들을 나눠주셨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내용은 ‘달리기의 사계절’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러너의 1년은 가을에 결실을 맺고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추운 겨울이 시작되면 러너의 새로운 1년도 다시 시작되죠. “


겨울이 새로운 시작이라니. 교수님은 겨울 달리기가 힘들지 않으신 걸까요?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교수님 또한 사계절 중 겨울에 달리는 게 가장 힘들고 내키지 않는다고 하시더군요. 겨울만 되면 “몸이 움츠러들고 따스한 불빛이 아른대는 동굴 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기 십상”이라고. 그래서 겨울마다 그렇게 살이 찐다고. 20년을 달린 교수님도 저와 같은 겨울 고민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반갑고 위안이 되었습니다.


겨울은 유독 따스한 실내에 머물고 싶은 계절이고, 달리러 나가기 위해 챙겨야 할 방한 아이템들도 많아 거추장스러운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방해 요인들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복장을 갖추고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을 나서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그 어떤 계절에도 맛보지 못한 ‘겨울 달리기의 멋’을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쨍하게 맑은, 명징의 맛. “ 달릴수록 몸은 장작처럼 뜨겁게 타오르지만 그럴수록 머리는 차갑고 선명해져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또렷한 정신의 나와 마주할 수 있다고. 차가운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고, 나와 겨울바람 사이에는 뜨거운 입김과 거친 숨소리만이 존재할 그 고요한 몰입의 시간.


겨울 달리기의 매력은 어쩌면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걸까요? 갓 쪄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머리가 띵하게 시린 팥빙수에 곁들여 먹는 것 같은 그런 짜릿함을 닮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를 듣다 보니 두려움과 공포로 멀게만 느껴졌던 겨울 달리기가 늘 뒷모습만 보여줘서 도대체 앞모습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고 조바심 나게 만드는 옆집 오빠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얼굴을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 과연 차은우인지 박보검인지 아니면 그냥 옆집 사는 남자 사람인지 판가름이 나지 않겠습니까? 즉, 영하의 날씨에도 달려야만 하는 이유를 알고 싶다면 직접 달려보고 몸으로 느껴봐야 한다는 것.


겨울옷을 정리하다 보니 겨울 러닝복으로 안성맞춤인 묵은 옷들이 꽤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오래 입어 질렸지만 버리기는 아까웠던 경량 패딩, 언젠가 사은품으로 받아놓고 비닐도 뜯지 않은 넥 워머, 딸들이 더 이상 입지 않는 도톰한 후리스 재킷까지. 따뜻한 러닝용 장갑은 진작에 고마운 러닝 메이트 민송 작가님께 선물 받았고, 털모자는 종류별로 다양하게 구비중이니! 어머, 아이템은 이미 완벽히 갖춰졌네요? 이제 겨울 러닝을 위해 필요한 건 딱 하나, 영하의 날씨에도 밖에서 뛰어보겠다는 결심. 그거 하나면 되는 거였습니다.


달리기의 축복! 너무나 좋은 말이다:)


“달리기의 축복을 평생 넘치도록 받으세요!”

정세희 교수님이 사인과 함께 적어주신 메세지입니다. 달리기 대선배님의 진심어린 응원에 힘입어 ‘겨울 달리기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을 용기를 내볼까 합니다. 게다가 겨울 달리기 후 돌봄과 치유의 음식으로 뜨끈한 순대국과 진한 라떼까지 추천해 주셨으니 더이상 안 뛰고 고민만 계속할 이유가 없을 것 같네요. 얇은 옷 겹겹이 껴입고, 모자와 넥워머, 장갑으로 중무장하고는 찬바람 부는 천변으로 달려나가 보렵니다.


쨍한 겨울 달리기의 맛, 일단 한번 맛보고 올게요!


겨울은 달린 몸을 유난히 살펴 돌봐야 하는 계절이다. 달리기에다 추위까지 견디느라 지친 몸은 살뜰히 챙겨야 하는데, 이때 뜨끈한 순대국이나 라떼가 제격이다. 그뿐인가. 집에 돌아온 후 따뜻한 샤워로 겨울 달리기 의식은 마무리된다. 조금 전의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몸은 노곤해져 특별한 행복과 안락함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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