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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가방

고맙고 감사합니다.

by 따름

살롱쉬의 연정이는 결혼 25년 차 주부입니다. 이제 살롱쉬 모임의 주된 이야깃거리는 단연 건강입니다. 관절이 아파 운동을 못하는 친구, 얼마 전부터 갱년기가 와 요즘 몸도 마음도 힘이 들다는 친구 등등, 온통 건강이야기로 3,4시간은 기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누가 더 아픈지 입이 아프도록 자랑들입니다. 반면에 연정이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만하면 건강하지'라며 위안 아닌 위안을 얻습니다. 또 한편으론 친구의 아픔이 자신의 입장에서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미안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연정이네 아이들은 큰 말썽 없이 어엿하게 자랐고, 부부는 몸에 적당한 병 하나씩을 안고 살며, 남편과 큰 다툼 없이 '보통의 삶'을 이어왔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인생에 대단한 굴곡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작은 돌부리에 넘어져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 백 살쯤 살아보니 이제는 조금 알 것만 같습니다. 남들도 다 이렇게 아프고 다치고 속상해하며 지지고 볶으며 살고 있다는 것을.

평탄하지 않은 것이 원래 보통 인생이라는 것을.


큰 부자가 되길 꿈꾸지도, 대단한 명예를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온 세월이었습니다. 물론, 작은 돌부리가 깊은 상처를 남긴 순간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조차 마음의 여유로 자잘한 것이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매일 '이만하면 감사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하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자만을 했던 것이었을까요. 너무 안심을 했던 것이었을까요.

순서도 없고 예외도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쓰러졌습니다.


아, 인생은 산이었구나. 살아도 살아도 돌부리는 줄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는구나. 심지어 이번엔 바위였습니다. 그 그늘만으로도 연정이의 키를 훌쩍 넘는 바위의 존재 앞에 무너질 듯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남편이 쓰러져 있는데 연정이마저 무너질 수는 없었으니까요. 급한 불부터 꺼야 했습니다. 급한 마음에 불씨를 하나하나 찾아 동동거리며 발을 구르지만, 과연 불길이 잡힐지 여전히 불안합니다. 연정이는 혼자 주저앉아 눈물짓습니다. 자신의 무능함에도 무릎을 꿇고 지난날 가족을 위해 애써온 남편이 한없이 작아 보여 그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그 불안은 연민에서 비롯됩니다. 30년 넘게 성실히 회사에 다니며 오롯이 가족을 위해 살아온 사람. 그런 사람이 그 젊은 나이에 마음껏 쉬어보지도 누려보지도 못하고 아파 누워 있다니. 누워있는 남편의 가방을 정리하다 연정이는 다시 한번 주저앉습니다.


당신의 가방에는 언제나 가족의 물건으로만 가득했더군요.


남편이 자리를 비운 집은 금세 달라졌습니다. 넘쳐나는 재활용 쓰레기, 비어 있는 휴지 케이스, 굶주린 어항 속 물고기, 마르다 못해 시든 화분들, 주인을 기다리는 빈 침대. 연정이는 그제야 깨닫습니다. 남편이 사소하게 챙겨 왔던 집안일 덕분에 자신이 얼마나 편안히 살아왔는지를.


남편의 물건은 최소 10년 된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가방은 더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옷도 신발도 많다며 늘 아이들 것만 챙기고, 정작 본인 물건은 거의 사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연정이는 얼마 전, 글루건을 또 샀다며 잔소리를 했던 사실이 떠올라 눈물이 가득 차올랐습니다.


남편의 가방과 옷을 정리하며 연정이는 생각합니다.


퇴원하거든, 이제 당신 가방에는 오직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만 가득 채우세요.

당신의 등에 업혀 내가 그 가방을 메고 살아왔다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참 고맙고, 또 미안합니다.

그러니 잘 먹고 몸조리 잘해서, 우리 함께 좋은 것 보고,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닙시다.




인생에서 온전한 희생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채 누군가의 희생으로 지금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함께하는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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