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무너진 발란스
남편의 급작스런 입원으로 집을 비운뒤 며칠 만에 여는 현관문이었다. 단 며칠 만에 달라진 집안의 공기가 무겁게만 느껴졌다. 친정엄마가 다녀가시긴 했지만 아이들끼리만 주로 있었을 집안. 남서향의 거실과 작은 두 방의 닫혀 있는 유리문을 뚫고 기어이 들이닥친 열기 때문인지,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집안의 공기는 무겁기만 했다. 아니 연정의 마음이 더 무거워서 집안의 공기마저 더 그렇게 느껴졌었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손이 두 개이고 발이 두 개이고 눈이 두 개인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다. 하물며 한 가정 내에 엄마와 아빠가 있어야 집안의 균형이 잘 유지될 텐데, 혼자 그 균형을 잡으려 애를 쓰는 일이 대단한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연정은 단 며칠 만에 알 것 같았다. 한쪽 어깨로는 남편을 부축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짐을 한가득 들었다. 어떻게든 주차장에서 한 번에 모든 짐을 옮기려 한 연정이의 무모한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키가 5 센티미터는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목에 생긴 쇼핑백의 흔적과 시큰한 손목의 통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나마 양 어깨에 맨 배낭은 조금 나았지만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거운 짓눌림에 의해 조만간 바닥에 붙어버릴 것만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침대에 뉘우고 짐만 겨우 현관에 던져 놓은 채 연정은 제일 먼저 샤워를 했다. 어떻게든 입원을 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대형병원 응급실의 벽은 대단히 높았다. 아니 우리보다 더 응급한 환자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니 외래로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입원이 가능했던 건, 간호사 말대로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었지만 정작 정신이 너무 없던 연정은 자신의 물건은 하나도 챙겨가지 못했던 것이었다. 집에 돌아와 이제서야 겨우 병원균을 씻어내 본다. 씻고 어서 정신을 차려야 했으니까.
샤워기의 물줄기가 연정의 정신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아니 연정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맑아진 정신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연정만이 해결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이 보였다. 집안에 쌓인 빨랫감보다, 퇴원 이후로 미뤄둔 보강 수업 안내 문자를 돌렸다. 오랜만에 만난 둘째와의 짧은 인사를 마무리하고 연정은 다시 가방을 바꿔 메고 출근을 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원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재입원이 예약된 상태이지만 이렇게 잠시 퇴원해 아이들 보강을 해줄 수 있는 것만으로 한편으론 감사하다고 여겨졌다. 예상 시험문제들로 가득한 가방을 메고 학원의 불 꺼진 교실 문을 열었다. 단 며칠을 비워두었을 뿐인데 몇 달을 비워둔 것만 같은 낯설음에 연정은 어리둥절했다. 생각해 보니 단 며칠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벌어졌었다.
서울시내 대형 병원 응급실 앞엔 대낮에도 응급 환자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세상에는 아픈 사람도 정말 많고, 연정이 모르는 병도 정말 많으며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다. 연정은 고요한 우물 속에 갇혀서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 세상에서 만족하며 그냥 그렇게 살고 싶었었다. 굳이 알고 싶지 않은 넓은 세상을 이렇게 경험하게 되다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침대에 누워 응급실 앞에 대기를 하고 있는 더 위급한 환자들을 보며 같은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얻었었다.
중간고사를 앞둔 친구들만 간신히 보강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연정은 얼굴에서 이제야 열감이 느껴졌다. 몸이 보내는 신호들이 하나씩 감지되기 시작했다. '천천히 걷자 천천히 걷자. 조심해서 엘베를 타고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내 몸을 소중히 다루자' 연정은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연정마저 여기서 다치거나 쓰러지면 '애들은 어쩌지'라는 생각이 제일, 그리고 가장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여전히 진통제로 겨우 고통을 다스리는 중인지, 아니면 고통에 익숙해지는 중인지 잘 모르겠는 남편을 한번 들어다 보았다. 누워있는 와중에도 "당신이 쓰러지겠다"라며 오히려 연정을 걱정하는 신랑 손을 한번 토닥여주고 둘째 방으로 갔다. 저녁도 대충 짜파게티를 끓여 먹었다는 둘째를 보며 이제 혼자서 라면 정도는 끓여 먹을 나이가 된 것이 참으로 감사할 일이라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간호에 필요한 물건들을 주문했다. 그러다 문득 연정은 쌓인 빨래와 물건을 정리하다 뭔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앞으로 닥칠 일이 어떤 종류의 일들 일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곱게 자라지도 않았는데, 미래를 알 수가 없으니 내일이 더 막막하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둘이 나누어지던 짐을 혼자 지려니 오늘따라 더 외롭고 막막하기만 했다. 아직 어른이 덜 된 것일까. 남편을 간호하며 아이들을 돌볼 힘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분명한지 아닌지 연정은 의문이 들었다. 신은 감당 가능한 어려움만을 주신다는데 자신에게 과연 그러한 힘이 있기는 한지, 감당가능한 어려움이 맞기는 한지 두렵기만 했다. 지금껏 튼튼하다고 자부하며 살아온 두 어깨가 자꾸만 자꾸만 꺼지는 느낌이 들어 오늘 밤 연정은 한잠도 못 잘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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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여니 / 따름 / 다정한 태쁘 / 김수다 / 바람꽃 / 아델린 / 한빛나 / 새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