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조와 임경선의 교환일기]를 읽고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피곤함의 지분’ 이라는 말이었어요. 요즘 제 일상을 돌아보면, 이 단어만큼 제 삶에 찰떡같이 맞는 표현도 없습니다. 마음의 지분율은 하루에도, 고작 일주일 사이에도 몇 번씩 요동칩니다. 어느 날은 파란 장대음봉을 그리며 바닥을 치고, 또 어느 날은 빨간 장대양봉을 그리며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지요. 불안함의 도지가 마음의 90%를 차지했다가, 다음 날엔 잠자리 도지처럼 날아든 작은 안도감이 그 불안함을 몰아내기도 합니다. 예측 불가능한 마음속 지분율. 예상이 어려우니, 위험률은 늘 최고조입니다. 그렇게 눈앞에 닥친 하루하루라도 정신없이 살다 보니 이젠 피곤함이라는 친구에게 완전히 M&A를 당한 기분입니다. 피곤함의 지분율 99%. 이제 남은 1%의 나는 어디쯤 있을까요.
겉으로는 모든 행동이 내 판단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의사결정 속엔 ‘나’가 없습니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듯한 느낌. 요조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일상에서 '피곤함'의 지분이 점점 커지는 기분이 들어요.
몇 년 전만 해도 나에게 즐거움과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많은 것들이
지금은 피곤함의 영역으로 나도 모르게 넘어와버렸어요.
정말 그렇습니다. 예전엔 즐거웠던 일들이 이제는 모두 피곤해졌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쇼핑하고 여행을 다니던 일들까지. 이제는 모두 무색무취의 피로 속에 잠식되었습니다.
오늘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다 귀찮다”는 제 말에 그 친구는 이렇게 말했어요. “우울하지만 않으면 돼.” 그 말을 듣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피곤함의 지분이 몇 퍼센트를 넘어서면 우울함으로 접어드는 걸까? 피곤함이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건 살다 보면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복막염 같은 일일까? 아니면 마음을 다잡고 다시 설렘과 행복의 영역으로 옮겨야 하는 걸까? 그게 가능은 한 걸까?
하루 종일 해야 할 일이 많아 딴생각할 틈이 없는 날은 오히려 괜찮습니다. 그런데 여유가 생기는 순간, 어제의 피곤함까지 한꺼번에 밀려와 파도처럼 덮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냥 둡니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둥지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립니다. 다시 바빠질 날이 오기를, 정신없이 일에 치이기를 바라면서요.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질 땐 머릿속의 혼잡함도 그냥 내버려 둡니다. 파도야 때려라. 천둥아 울려라. 그냥 내버려 둡니다. 해결하려 하지 않고, 정리하려 애쓰지 않고, 억지로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죽은 듯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신기하게도 “잘하지 않아도 된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 말 덕분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시 밖으로 나갈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가만히. 오늘은 꼼짝하지 말자.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피곤함도 제풀에 지쳐 스스로 사라지지 않을까?
조용히 숨만 쉬는 사람에게 피곤함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그렇게 심심해진 피곤함이 스스로 물러가길 바랍니다. 조심스레 희망을 걸어 봅니다.
그래요. 너무 피곤할 땐 그냥 죽은 듯 가만히 있어봅시다. 며칠 그렇게 있어보니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 없다는 듯 너무도 잘 돌아가더군요. 큰일이 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시 쉬어가요. 우리, 그렇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