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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보다 캉골

나에게 가장 잘 맞는 가방

by 따름

바꾸고 싶은 가방이 하나 있습니다. 검은색 면 재질의 가방인데, 너무 오래 써서 색이 얼룩덜룩 빠졌고 형태도 점점 본래의 각을 잃어 흐물흐물해졌습니다. 큰 주머니 하나와 그 안의 작은 주머니가 전부인, 모양도 색도 재질도 특별할 것 없는 가방인데도 저는 왜 새것으로 바꾸지 못하는지, 왜 새 가방을 사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왜 이토록 이 가방만 들고 다니는지, 다른 가방이 없어서도 아닌데 말입니다.


생각해 보니 하나의 이유는, 이 가방이 가졌던 ‘본래의 각’이 없어졌기 때문인 듯합니다. 반달 모양의 예쁜 가방도 있지만, 자주 들고 다니는 A4 서류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모서리의 앳지 덕분에 보기엔 멋졌지만, 실용적이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초록색 각이 살아 있는 핸드백도 있습니다. 금색 장식의 어깨끈까지 달려 있어 잘 차려입어야 어울리는 가방입니다. 하지만 매일 운동화를 신고 뛰어다니는 제 일상에는 너무 과한 장식이었습니다. 결국 그 가방도 장롱 속에 들어갔고, 저는 다시 익숙한 그 검은 가방을 들었습니다.


저에게 가방은 ‘그때 필요한 물건을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담고 싶은 물건의 크기와 종류는 그때그때 너무 다양하고, 상황마다 필요도 달라집니다. 그 모든 조건을 충족해 온 가방은 결국 지금 이 가방뿐이었습니다.


지인과 카페에서 차를 마신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네 야채 가게에 들러 오이와 감자를 한 봉지씩 샀습니다. 비닐봉지는 아깝고 환경에도 좋지 않으니, 어깨에 멘 가방에 그대로 넣었습니다. 책도 있고 서류도 있었지만 이 정도는 거뜬했습니다.


조금 더 걷다 보니, 추워진 날씨 탓에 길가의 붕어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붕어빵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올해 첫 붕어빵을 먹는 모습을 상상했습니다. 어릴 적 퇴근길 아빠의 손에 들려있던 그 붕어빵을 상상하며, 엄마가 사다준 붕어빵의 따뜻한 기억이 아이들 마음속에 남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이와 감자로 이미 불룩해진 가방 속에 붕어빵 봉투까지 쏙 넣었습니다.


걷다 보니 살짝 무거워졌습니다. 감자는 아직 두 개쯤 남아 있었는데 괜히 샀나 후회도 됐지만, ‘우리 집 필수 채소는 떨어뜨리지 말자’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녁엔 아이들이 좋아하는 감자전을 해줄 마음이었으니까요. 네모난 가방은 오이와 감자, 붕어빵, 책으로 울퉁불퉁해졌습니다. 본래의 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고, 그때그때 담은 내용물의 모양을 그대로 드러낼 뿐입니다. 자신의 모양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날 선 각을 세운 모서리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방의 역할은 결국, 무언가를 담고 실어 나르는 일일 것입니다.


예전에 가수 지드래곤이 비행기 안에서 자신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는 기사로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내려놓은 것은 단순히 ‘가방’이 아니라 ‘고가의 명품 가방’이었기 때문이죠.


가끔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그런 비싼 가방을 산다면 어땠을까. 고가라서 예쁜 건지, 예뻐서 고가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나는 그 가방에 감자나 붕어빵을 넣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바닥에도 내려놓지 못하고, 흠집이 날까 조심하며 들고 다녔겠죠. 그런 가방은 더 이상 나의 ‘생활 가방’이 아닐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가방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가방을 보는 안목이란, 결국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가방을 알아보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제게 가방을 바꾸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그것을 담아낼 만한 가장 적당한 가방은 무엇일까요.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가방을 새것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동안 내 무거운 짐들을 함께 나른 이 색 바랜 가방은 어떻게 될까요? 버려졌다는 마음에 슬플까요, 아니면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며 홀가분할까요?


요즘은 아이들이 커서 각자의 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덕분에 저는 쓸모를 다한 색 바랜 가방을 보며 묘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슬프다기보다, ‘이제는 내 것을 담을 차례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갈 때, 나도 내 삶을 새로 살아갈 궁리를 해야겠지요. 아이들에게 기대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도 해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최후의 보루일지언정, 서로의 전부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부모가 전부인 아이로 키우고 싶지도 않으니까요.


가방에 수명이 있듯, 부모의 역할에도 수명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끝이 없을 것 같던 육아와 삼시 세 끼의 날들이 어느새 긴 터널을 지나 밝은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멀리서 희미하게 그 불빛이 보이는 듯한 시간의 연속입니다.


그간 열심히 달려왔으니 후회도, 미련도 없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달려왔다고 믿었던 수많은 날들이 되돌아보니 결국 내 안에 자산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가방 속의 물건은 언제나 가족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는 공허함에 울던 밤도 있었지만 이제는 압니다.


아이를 키우며 나를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시간 덕분에 더 강하고 유연하고 부드러운 내가 되었다는 것을.


비록 색은 바랬고 형태도 흐트러졌지만, 그 덕분에 더 다양한 모양의 것들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모난 것, 뾰족한 것, 세모난 것까지.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 성장했다는 그 마음만으로도 그리고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엄마로 살아온 삶은 축복이었고, 최고의 행운이었습니다. 나를 엄마로 만나 고생 많았을 우리 아이들, 나를 아내로 만나 마음고생 많았을 남편에게도 고맙습니다. 유연한 가방이 되기까지 그 빳빳함과 모남을 함께 견뎌낸 사람들이니까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더 유연한 마음으로 많은 것을 담았다가 덜어내고, 또 담아내고 덜어내는 과정을 겪으며 앞으로도 더 유연하게 성장해보려 합니다. 인생은 끝을 향해가지만, 언제나 진행형의 미완성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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