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모린다. 4월. 동네 사람들은 논 갈고 밭 갈고 할 텐데 나는 하릴없다. 침대에 누워서 눈만 꿈-뻑 꿈-뻑.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내가 멈춘 건가. 옆 사람이 똥을 싸재끼는 걸 보니 시간도 나도 멈춘 건 아닌가 보다. 나는 꿈뻑 꿈뻑, 옆 사람은 깜빡 깜빡 한다.
누가 심심하진 않냐고 물으면 그제야 내가 심심한가 보다- 한다. 심심한 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익숙해졌는데 고장 난 내 다리는 왜 이리도 일평생 쑤시고 아픈지. 콕 콕 콕 콕. 하루종일 콕 콕 콕 콕. 이 나이 되면 다들 그렇다고는 하는데 테레비 너머 저 여편네는 나랑 나이도 같으면서 온 세상 구경을 다 하고 산다. 나는 내가 제일 아픈 것만 같다. 서럽다. 그래도 이곳을 둘러보면 내가 제일 멀쩡하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 나는 저렇지도 않은데 왜 여기 있나- 한다.
오늘은 큰아가 나를 데리러 온단다. 지난번에 집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이 “말라꼬 오노.”라는 말 뒤에 숨는다. 괜히 나 때문에 돈 쓰고 귀찮아질까 봐 걱정이다. 전화기를 덮고 며느리가 사다 준 도톰한 겨울옷을 꺼내 입는다. 들어올 때 입은 옷인데 지금 입기엔 두꺼워졌다. 집에 가면 얇은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 봄에 맞게.
휠체어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니 웬 여자가 나를 보며 서 있다. 이젠 눈도 침침해서 누군지 모리겠다. 가까이 다가가니 손녀다. “할머니~~” 하며 부르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왜 이렇게 부었냐고 난리다. 내 얼굴이 어떤지 나는 모린다. 밥 주면 밥 먹고 약 주면 약 먹고 불 끄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다. 나는 내가 어떤지 아무것도 모린다.
손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을 떠난다. 손녀는 봄이라고 했다. 꽃이 활짝 피었다고 했다. 나에게 봄꽃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양옆으로 하얀 꽃나무가 길게 늘어졌다. “예쁘다…”“예쁘다…” 뭐라 더 말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예쁘다는 말만 했다. 눈을 뗄 수 없이 참으로 고왔다. 봄꽃이란 이런 거구나…. 89년 인생, 첫 꽃놀이었다. 봄을 느낄 새도 꽃을 볼 새도 없이, 그런 게 뭔지도 모른 채 살았다.
큰아랑 해림이 어마이랑 집에 가서 봄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병원으로 왔다. 달고 쌉싸래한 외출이었다. 아까 본 봄꽃이 눈에 일렁거린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하얀 솜뭉치 같은 것들. 돌아오는 길에 손녀는 할머니 얼굴을 봐서 좋다고 말했다. 이른 나이에 영감 먼저 떠나보내고 마음에 대장장이질을 하며 악착같이 살았다. 이제 웬만한 거엔 끄떡도 없지만, 손녀의 말이 내 마음을 간지럽힌다. 마음에 봄꽃이 피는 기분이었다. 고맙다. 고맙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꽃놀이를 해볼꼬. 천장에 봄꽃을 그리며 눈만 꿈-뻑 꿈-뻑. 손녀 덕분에 올해는 운이 좋았다. 운이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