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끈적하고 달콤한 한 입
"Min, Are you done with duty free? You HAVE to try this. This is soooooooooo good."
"민 듀티프리 끝났어? 이거 꼭 먹어봐야 해. 진~~~~~~~~~~짜 맛있어."
시드니-오클랜드 세 시간 정도의 비행에서 서비스를 끝내고 듀티프리까지 팔고 나면, 뭘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다. 새벽에 호텔에서 나오기 전 마셨던 커피가 전부니, 랜딩이 가까워져 오면 배에서는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날 지경. 호주에서 실린 케이터링이 예술이라며 동료들은 먹어보라고 성화지만 나는 지금 이 배고픔을 참을 힘이 있다.
그건 바로 오클랜드에서 먹을 수 있는 '호떡'이다.
'호텔에 도착하면 바로 나가서 사 먹어야지.'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났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오클랜드 프로젝트.
한국에선 겨울이 되면 생각나는 간식이 호떡이라는데, 나는 뉴질랜드의 수도 오클랜드 비행에서 떠오르는 게 호떡이다. 언덕배기 호텔에서 시내 방향으로 내려가면 한국인이 하는 호떡집이 있다.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코리안 펜케이크'를 판다고 적어놓은 걸로 기억한다. 물론 한국 길거리에서 파는 호떡과 완전히 똑같은 맛은 아니다. 빵 같은 식감이 살짝 더해진 쫄깃함이지만, 어렸을 때 먹었던 호떡과의 싱크로율은 90퍼센트. 이만하면 훌륭하다.
오클랜드 호떡집에는 신기한 메뉴도 있다. 기존 호떡의 틀을 깬 다양한 메뉴들. 치킨 앤 치즈, 비프 앤 치즈, 베이컨 앤 치즈, 햄 앤 치즈 등 식사 대용의 필링을 넣은 호떡들이다. 그리고 좀 더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초콜릿이나 단팥을 넣은 호떡도 있었다.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현지인들은 확실히 식사 대용 호떡을 많이 사 먹어서 놀라기도 했다.
내 픽은 늘 그렇듯 '시나몬 앤 슈거'. 클래식한 우리의 그 꿀호떡이다. 다른 게 뭐가 필요할까. 나에겐 오로지 그 맛 하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개수는 하나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욕심을 내면 세 개, 네 개까지도 거뜬히 먹을 수 있지만, 나의 건강과 체면을 생각해서 늘 두 개로 협상 타결.
나의 호떡 프로젝트에는 방해꾼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세계적인 카페 프랜차이즈, 스타벅스다. 나는 어딜 가도 카페에 가는 걸 좋아한다. 카페에 앉아서 커피와 간식을 시켜놓고, 가져간 책을 보거나 그날의 비행을 정리하는 순간을 무척 좋아했다. 로컬 카페는 자리의 여유가 없기도 해서 주로 프랜차이즈로 가게 되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호떡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호떡을 사면 먹을 곳이 마땅치 않으니 호텔로 돌아가야 했다. 늘 딜레마였다.
호떡을 포기했다면, 카페에 가서 커피와 머핀을 시키고 그 시간을 즐겼을 테다. 내가 머핀도 좋아하긴 하지만, 커피와 머핀은 어디서나 먹을 수 있으니, 언제나 그리웠던 호떡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버스 안. 꾸벅꾸벅 조는 크루도 있고, 24시간 스테이에 뭐 할 건지 계획을 세우는 크루들도 있다. 나에게도 묻는다.
"Min, what's your plan in Auckland?"
"민, 오클랜드에서 뭐 할 거야?"
"Nothing. I just need some sleep. I haven't slept enough because of the jetlag."
"아무것도 안 할 건데. 그냥 잠이 필요해. 시차 때문에 잠을 못 잤거든."
시차는 참 고맙게도 항상 적절한 핑계가 된다. 로비에서 차례를 기다려 키를 받고 곧장 방으로 올라간다. 유니폼부터 갈아입고 머리는 대충 풀어헤치고, 청명하고 눈부신 오클랜드의 대낮으로 발을 딛는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호떡집으로 향하지만, 여전히 가방엔 책과 다이어리가 들어있다. 아직도 고민 중이다. 스벅이냐, 호떡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끝까지 왔다 갔다 하다가도, 막상 호떡집을 보면 나는 그냥 호떡이다.
"꿀호떡 두 개 주세요." 그리고 아메리카노 한 잔을 테이크아웃한다. 오늘도 나의 오클랜드 프로젝트는 완벽하다. 카페 타임은 자연스레 다음날 아침으로 미뤄진다. 따지고 보면 나는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는다. 뭐가 먼저냐의 문제일 뿐.
호떡과 아메리카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이다. 마치 시나몬롤과 아메리카노처럼.
호떡을 받아 들면 고소한 기름 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손바닥에는 따뜻한 온기가 퍼진다. 이때 베어 물면 후회할 만한 뜨거운 맛이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기어이 입을 갖다 댄다. 첫 입을 베어 무는 순간, 뜨겁고 끈적한 달콤함이 입안에 천천히 번진다.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한 모금의 아메리카노를 절로 부른다. 식감은 다르지만 호떡의 달콤한 꿀과 시나몬 향은 시나몬롤과 닮았다. 그래서 내가 시나몬롤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호떡의 쫄깃하고 끈적한 맛은 입안에 오래 남는다. 한동안 계피향을 머금고 있다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진한 블랙커피가 입안을 개운하게 만들면, 다시 호떡을 한 입 크게 베어문다. 이렇게 달고 쓴 맛의 반복. 호떡이 다 없어질 때까지.
언젠가부터 언덕 위의 호텔에서 핑크빛 고풍스러운 호텔로 바뀌면서, 호떡집에서 더 멀어졌다. 남편과 시드니에서 연애를 할 때는 호떡에 큰 아쉬움도 없었다. 호떡은 아니지만 시드니에선 한국 빵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만의 오클랜드 프로젝트도, 쓸데없는 딜레마도, 그때 그 호떡집도 내 삶에서 점점 페이드 아웃되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한국에 돌아온 지금은 호떡을 먹으면 오클랜드가 떠오른다. 날씨가 추워지니 호떡 생각이 났고, 이어서 뉴질랜드가 떠올랐다. 문득 그 호떡집을 검색해 보니, 이름이 '넘버원 팬케이크'였다. 10년이 넘게 그 자리에 있었던 호떡집은 이제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갔던 그곳은 이제 없다. 더 이상 비행으로도 갈 일이 없는데, 어딘가 좀 쓸쓸해지는 건 왜일까.
빵도 사람처럼 시절인연인가. 그때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던 호떡. 그때가 아니었다면 만날 수 없었던 맛, 그 온기까지. 내게는 분명 하나의 ‘시절인연’이었다. 오늘, 그 인연이 유독 떠오르는 밤이다.
기온이 뚝 떨어지고, 따뜻한 커피와 호떡이 생각나는 계절.
2025년 겨울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