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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유의 밀린 일기

ep.17 아무래도 여기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요

by 페퍼유

비이커팀에서 두 달간의 인턴 이후 8개월 만에 다시 비이커팀을 찾았다. 조금의 변화는 있었지만 그래도 익숙한 팀에 와서 마음이 편했다. 꿈꾸던 팀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팀에 배치받고 제일 많이 들은 소리는 “왜 고생길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왔어”였다. 아무래도 1년이 채 되지 않은 팀이고 회사에 많지 않은 멀티샵 비즈니스 모델이다 보니 애로사항이 많았다.


그중 나를 힘들게 한 두 가지가 있었는데 엑셀과 SAP 시스템이었다. 통계학 수업 때도 엑셀을 유난히 싫어했는데 바이어/MD의 일은 엑셀 없이는 할 수 없는 숫자 점검의 연속이었다. 예쁜 옷을 보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보는 것은 깜지와도 같은 엑셀시트에 빼곡히 차있는 오더 관련 숫자뿐이었다.

스크린샷 2025-07-03 오전 12.51.02.png 내가 생각하는 바이어의 이미지는 대충 이런거였는데 말이지..

무튼 나는 엑셀 VLOOKUP, IFERROR 수식이 손에 익지 않아 초반에 깨나 고생을 했다.


그다음 문제는 회사에서 사용하는 사내 시스템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오랜 사내 아카이브로 꽤나 체계적으로 구성된 시스템이었으나 멀티샵 운영엔 변수가 많았다. 브랜드도 품목도 다양한 데다가 브랜드별로 다 다른 방식으로 오더가 오가다 보니 이걸 일원화하여 시스템에 반영하려면 수많은 에러 메시지를 바탕으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다행히 회사는 팀에 맞게 시스템을 업데이트해주는 일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열려있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 변수를 겪고, 브리핑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 변수를 가장 많이 경험한 건 제일 경험이 부족했던 나였다. 시스템팀에 수없이 불려 다녔다.


이런 시스템 상의 미비함과 휴먼에러가 겹쳐 당시 문제가 한번 터졌는데, 말로 설명하긴 좀 복잡하지만 선배가 수식을 거는 과정에서 에러가 생겨 시스템이 완전히 꼬여버린 일이 있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두 명의 선배들이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계셨다. 오지랖이 넓었던 신입사원 페퍼유는 어떻게 하면 선배님들의 고충을 좀 덜어드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해결해 보겠다고 했다.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불필요한 치기에서 온 말 한마디로 나는 주말까지 나와서 이 문제에 매달려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는 분야이고 시스템에도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을 쓰면 쓸수록 오히려 일은 더 꼬여만 갔다. 결국 선배님들이 이를 바로잡는 시간이 더 걸렸다.


그 이후로 깨달았다. 불필요한 오지랖과 치기는 오히려 서로에게 더 피로함을 주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는 걸. 뭐든 열심히 하고 더 배우려는 신입사원의 자세도 중요하지만, 우선 시키는 일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하는 게 신입사원이 해야 할 역할이라는 걸.


시스템과 엑셀에 완벽히 적응하는 데에는 고박 1년 정도가 걸렸다. 이 1년이 솔직히 너무 괴로웠지만 그 하드트레이닝 기간이 있어서 물리적인 업무 시간은 훨씬 수월해졌다. 시스템은 시스템일 뿐이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결국 일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한 툴이다. 이 툴이 다소 미비하고, 적응 시간이 오래 걸릴지언정 적응하면 그만큼 편한 것이 없다.


패션 회사를 준비하는 사람이라면(패션 회사가 아니더라도)시간 나면 엑셀은 어느 정도 숙지를 해놓으면 좋을 것 같긴 하다. 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수식과 툴은 한정적이었지만, 엑셀을 잘하는 친구들은 확실히 이 과정에서 좀 더 편하고 빠른 방법을 똑똑하게 찾아냈다. 나는 그런 동기들을 부러워하면서, 만들어놓은 수식을 고맙게 잘 쓰는 신입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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