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 회사 다니면서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였나요?
신입사원 직무 소개 교육을 하다가 한 신입사원이 질문을 했다. “회사 다니면서 가장 힘든 시기가 언제였나요?” 앞서 입사하자마자의 1년이 힘들었다고 했지만 사실 잊지 못할 정말 힘든 시기가 한번 있었다. 4년 차쯤 되었을 때였나.
그 당시 비이커 여성 브랜드는 한 시즌에 약 120개였고,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는 40개 정도? 한 시즌이 정말 정신없이 돌아갔다. 엠디가 브랜드와의 거래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물품 대금 지급이었다. 오더한 상품이 물류에 잘 입고됐다는 것이 확인되면 그에 해당하는 대금을 확인하고 재무팀에 지급을 신청하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던 중 오래 거래해 온 한 브랜드 담당자로부터 메일이 왔다. “우리 계좌번호가 바뀌었으니 다음 송금부터는 이 계좌로 보내줘” 종종 있는 일이었다.
송금을 신청하려면 인보이스를 포함 모든 정보가 기입되어있는 서류를 첨부했어야 해서 나는 “새로운 계좌번호가 적힌 인보이스를 보내줘”라고 답장을 보냈고, 인보이스를 받아 새로운 계좌로 송금을 신청했다.
일주일 정도 지났을 즘, 야근을 하고있는데 그 브랜드 담당자로부터 메일이 왔다. “송금했다던 금액이 안들어왔는데 다시 확인해 줄 수 있어?” 그럴리가 없는데.. 생각하다가 “지금은 늦었으니 내일 재무팀에 확인해 보고 알려줄게”라고 메일을 쓰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순간 나는 얼음이 되었다.
메일 주소가 이상했다. 분명 담당자의 이름은 맞는데 처음보는 도메인이었다. 아직도 그때의 오싹해진 등골을 잊지 못한다. 피싱을 당했다. 눈 앞이 노래지면서 무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나의 절망적인 모습을 발견한 직속 선배가 무슨일 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피싱을 당한 것 같아요."
패닉 상태에 빠진 나에 비해 선배는 놀라우리만치 침착했다. 그때가 야근하다가 거의 밤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기에 유관부서와 확인할 수는 없었고, 다음 날 빠르게 확인할 수 있도록 처음 그 메일이 온게 언제이고, 어떻게 된 것인지 타임라인을 만들어 정리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내일 빨리 출근해서 보고하는게 좋겠다고 패닉 상태의 나를 달래주셨다. 잠을 한숨도 못자고 아침잠이 없는 사람처럼 빨리 출근해서 회사에 상황 보고를 했다.
이를 완전히 해결하는 데까지는 한달이 넘게 걸렸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돈은 당연히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해당 브랜드에서 해킹을 당해 이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되어, 그 브랜드에서 회사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고 일단락이 되었다.
1차적인 잘못은 범죄자인 피싱범들에게 있지만 사실 메일주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나의 잘못이 분명 있었다. 수천만 원이 되는 돈이었기에 사건을 해결하는 한달동안 만약 이게 해결되지 않는다면 나의 퇴직금을 반납하고라도 퇴사를 해야하나 하는 생각까지도 든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직원을 그런 상황에 몰아넣는 곳이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더 그러했다. 후배의 잘못 혹은 실수를 같이 해결하고 도와주는 데에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다. 큰 트라우마로 남을뻔 했던 큰 실수였지만 선배들이 있어서 이겨낼 수 있었다. 나도 그런 선배가 되어야지 결심했다. 다행히 나의 후배들은 똑똑해서 이런 실수를 만들지 않았지만.
그 사건은 회사에서 있었던 첫 피싱 피해 사례로 남았고, 그 이후로 해외 거래처 계좌를 변경하려면 담당자와의 영상통화를 통해 계좌 변경을 컨펌해야하는 프로세스가 추가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다 써진 메일도 다시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