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삼성 1호 그 두 번째 이야기
코로나 1호 확진자가 나오며 회사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회사 차원에서 나름 기사가 나는 것을 막으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신 것 같은데 언론사는 “삼성 최초의 확진자” 특종을 놓칠 리가 없었다.
<비이커에 재직 중인 유모씨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아 건물을 폐쇄했다> 기사가 순식간에 쏟아졌다.
너무 무서웠고, 기사를 보고 나인 것을 알게 된 지인들의 걱정스러운 연락이 아픈 와중에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며칠 동안은 카톡을 안 보고 살았다.
https://asiatime.co.kr/1065589846191149
(혹시나 하고 검색해 보니 기사가 아직 있더군여..)
처음 입원이라는 것을 해봤는데 호사스럽게도? 그게 1인실었다(당연). 입원하고 며칠은 오한이 계속되어 아무리 옷을 껴입고 이불을 덮어도 춥고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증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 4일? 이후엔 사실 아픈데도, 열도, 오한도 없이 아주 멀쩡했다.
다만 미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뒤늦게 이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후유증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정보가 없었던 나는 이게 입원실 안의 음압기(감염병 환자 격리실에서 공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하는 기계) 때문인 줄 알았다. 아무리 자극적인 것을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살면서 가장 짜게 먹은 기간이었을 거야.
몸은 더 이상 아픈 데가 없었지만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지 않아 나갈 수가 없었다. 출장부터 너무 무리를 했으니 조금 쉰다는 마음으로 며칠 더 있어야지 생각은 했지만 팀원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출장 다녀와서 제일 바쁜 시기에 자리를 이렇게 강제로 비워야 하다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곧 이 미안함과 불편함은 엄청난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며칠 후, 같이 출장을 갔던 과장님, 엄마, 동생이 차례로 확진을 받고 격리되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괜찮다고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게 다 나의 잘못인 것 같아 괴로웠다.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음성이 나오지 않아, 나와 같이 증상이 없는 감염자들은 태릉선수촌으로 옮겨졌다. 30분 남짓 구급차로 이동을 하는데 이 와중에 병원 밖을 한 달 만에 나와 어딘가로 이동을 한다는 게 감개무량할 지경이었다.
태릉선수촌의 장점은 침대가 넓어 편하다는 것, CCTV가 없어서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었다. (병원 입원실에는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기 위한 카메라가 항상 돌아가고 있었다.) 하루 세 번 도시락이 문 앞으로 배달되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올드보이가 따로 없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이패드로 온갖 OTT 콘텐츠를 보는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내가 이때 유튜브를 시작했으면 대박이 났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호 물품 언박싱, 격리 상태 도시락 먹방 등 이것저것 콘텐츠 찍을게 많았었는데 말이야.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지만 태릉 격리시설에서도 한 달간 나오지 못했다. 일주일에 검사가 두 번 있었는데 결과를 알려주는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기대감이 배신감과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2평 남짓 크기의 방에서 나올 수가 없으니 생전 없던 폐소공포증 비슷한 게 생겼다. 창문 방충망을 뜯고 잠시라도 나가고 싶다는 충동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는지 화상으로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정신과 선생님과 통화하며 너무 나가고 싶다고 거의 매일같이 울었다. 옆방에서도 매일같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드디어 한 달 후 음성이 나왔다는 결과를 받았을 때, 제일 많이 울었다.
퇴소?를 하고 집에 와서도 한 달 동안 밖에 나올 수 없었지만 그래도 집이 좋았다. 회사 컴퓨터를 집으로 받아 재택 하는데 두 달 만에 하니 일도 재밌더라고요?
그 이후로 3년가량은 출장 없이 버츄얼로 모든 오더를 진행했다. 사진만 보고 하는 오더라서 뭐 하나 자신 있게 할 수 없었지만 시기 상 아무도 해외여행이나 쇼핑을 할 수 없었던 시국에 국내 수요가 폭발하다시피 하여 역대급 매출과 판매율이 나오기도 했다.
이게 벌써 오 년 전이라니.. 뒤늦게 얘기해 보는 이제는 추억인데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네.. 모두 건강관리 잘하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