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최연소 치프바이어
“나 퇴사해”
청천벽력 같은 선배의 퇴사 선언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여성복 바이어는 네명이었는데 그중 치프(헤드) 바이어였던 선배가 퇴사를 선언한 것이다. 나에게 늘 영감과 방향성을 주시던 디렉터님이 퇴사하시고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마주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점에 당시 남성복 치프바이어 선배도 퇴사를 결정하면서 팀의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
팀에서는 새로운 치프바이어를 찾을지, 둘째였던 나와 내 동기를 그 자리로 올릴지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많은 고민 끝에 결국 팀에서는 다른 팀 치프바이어들에 비해 경력이 짧고 나이도 어린 나와 내 동기를 치프바이어로 올리는,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파격적인 결정을 해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치프바이어 자리가 탐나지 않았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즌별 100억이 넘는 바잉 버젯을 내가 관리하고 이끈다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맞나?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난 늘 성실하고 완벽한 J 성향의 선배 밑에서 둘째로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고 익숙했다. 하지만 이젠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했다.
P인 나 괜찮은 걸까..
역시나 처음엔 서툰 것 투성이었다. 비이커에서 신입사원부터 시작해서 누구보다 히스토리를 많이 알고 있는 직원 중 한 명이었지만, 그 자리는 그것만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내가 담당하던 브랜드들만 집중했던 지난 시간이었다면, 이제는 숲을 보는 연습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나를 그 자리에 앉혀 주신 선배님들, 나의 디렉션을 기다리는 후배들, 바잉한 상품을 고객에게 직접 판매하시는 점장님들까지 내가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안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바잉 출장 때도, 출장을 다녀와서 리뷰를 할 때도 두 세배로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바이어들의 의견과 목소리를 자신감 있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트렌드와 상품을 제일 가까이서 보는 바이어가 확신이 없다면 누가 안심하고 따라와 줄 수 있겠어. 근거 있는 자신감과 목소리, 그리고 눈빛을 보여줘야 했다. 치프바이어로서의 스타트는 삐그덕거림이 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순간 많은 분들이 믿어주셨다.
기회는 이렇게 예기치 못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그 기회를 어떻게 나의 포트폴리오로 만드느냐는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꾸준한 노력에 달렸다.
물론 어려움은 있었지만.. (다음 파트에)